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정체성을 되찾는 이야기다. 저자 알렉산드리아와 가해자 리키가 어릴 때 받은 학대의 이야기가 투 트랙으로 진행된다. 그녀는 열두 살때까지도 침대에 오줌을 쌌다. 침대가 축축하게 젖으면 누구도 자신을 찾아오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할아버지는 자신을 무릎 위에 앉히고 입을 맞추고 몸을 만졌다. 쌍동이 오빠 앤디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이 글을 시작할 무렵 나는 비디오테이프에서 본 남자 때문에 내가 글을 쓰게 됐다고 생각했다. 리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서 나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로렐라이 때문에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리처드가 모텔 방으로 가서 여동생과 포옹한 날, 리키가 수갑을 찬 채 끌려 나가던 그날 오후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로렐라이는 리키에 의해 살해된 제레미의 엄마였다. 그녀는 재판정에서 리키가 사형 선고를 받을 때 재판정에 가지 않았다. 대신 길 건너 모텔 방에 앉아서 기다렸다. 오빠 리처드가 그녀에게 재판 결과를 알려주었다. 다 끝났어. 10년 뒤 리키의 재판이 다시 열렸을 때 로렐라이는 배심원들에게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이가 질렀을 단말마의 비명이 제 귀에 쟁쟁합니다만, 마찬가지로 저는, 리키 랭글리가 도와달라고 외치는 비명 또한 귀에 들립니다."

 

제레미의 엄마는 리키를 살리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할아버지가 자신과 여동생을 5년간 성추행한 사실을 떠올렸다. 로렐라이는 왜 그런 걸까?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이해해야만 했다."

렉산드리아는 리키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도 어릴 때 받은 아동 학대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가 제레미를 죽이게 된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이 책은 리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법정 증거와 알렉산드리아가 찾은 자료를 소설 형식으로 써내려간 세미 픽션이다.

 

저자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레즈네비치(Alexandria Marzano-Lesnevich)

 

리키 아버지 알시드는 어느 날 운전 중에 교각 받침대를 들이받았다. 앞 유리가 깨지면서 아들 오스카의 목이 잘렸고, 막내 딸 비키가 죽었다. 딸 셋은 살아남았다. 엄마 베시는 밖으로 튕겨나가 골반이 박살났다. 베시는 향후 30년 동안 오른쪽 다리만 서른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사고 후 베시는 발목부터 가슴 팎 위까지 석고를 한 채 누워 있어야 했다. 그사이 거짓말 같이 아이가 생겨 제왕절개로 분만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리키였다.

리키는 오스카의 미소와 목소리를 타고 났다. 알시드와 베시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빠져 흐느낄 때가 많았다. 리키는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아버지가 남자아이의 머리를 안고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리키처럼 갈색 머리에 리키처럼 짙은 눈동자, 목이 잘린 주변으로 동그렇게 피가 흘러 있었다. 리키는 알았다. 남자 아이가 자기처럼 다섯 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남자 아이는 고개를 돌리더니 갈색 눈을 뜨고서 리키를 빤히 쳐다보고 웃었다.   

 

어느 날 오후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리키는 엄마에게 그 남자아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엄마는 아이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형 이야기를 해 주었다. 리키는 죽은 형이 자기 옆구리를 찌르는 기사와 같은 존재여서 자기는 형을 없애고 싶어했다. 그리고 아홉 살이나 열살 때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추행하기 시작했다.

루스 이모를 찾아간 리키는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히 낌새를 알아챈 이모가 발견했다. "나는 어린 남자애를 좋아해요." 그가 말했다. "안 그러려고 무척 애를 써도 그래요, 성적으로요."

리키는 아버지와 외삼촌에게 맞으면서 자랐다. 리키는 아버지는 포기해도 외삼촌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복지사가 리키에게 누가 양육했냐고 물었을 때, 그는 외삼촌과 외숙모라고 답했다.

 

원제는 「The Fact of a Body」. 어릴 때 받은 성추행으로 몸에 새겨진 아픈 기억들. 언뜻 토르디스 엘바와 톰 스트레인저가 함께 쓴 『용서의 나라』 느낌도 난다. 타인을, 그것도 남자 아이를 학대한 가해자를 온전히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알렉산드리아는 평온한 감정의 톤을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잔잔하게 묘사한다. 가해자 리키에 대해 배심원과 법정은 사형을 선고했지만, 과연 리키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은 유죄일까, 무죄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르자노-레즈네비치(Marzano-Lesnevich)는 어머니의 성에서 딴 것이다. 표지에 있는 성에 '-'가 있어야 한다. '마르자노'가 중간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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