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여기저기서 주목받는 책이어서 잔뜩 기대하고 들춰보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크게 실망스럽다. 160쪽밖에 안 되는 분량으로 고대 그리스부터 근대에 이르는 서구 인문학의 각 분야를 개관하고 추천도서 목록을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작업임을 읽어 보면 금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 분야의 소개는 지나치게 개괄적이고 간략한데다가, 굉장히 전통적이고 보수적 시각으로 일관되어 있다. 서구중심적인 거야 그렇다 쳐도, 20세기 중반 이후에 등장한 다양하고 풍성한 이론적 성과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이에 대단히 적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모습은 이 책이 옹호하고자 하는 인문학과 교양의 가치를 무척 의심스럽게 한다. 이 책은 몇몇을 제외하면 무려 40-50년 전에 출간된 영어권 책들을 각 분야 최적의 참고서로 제시함으로써, '70년대 이후 인문학 커리큘럼과 방법론상에 나타난 일대 지각변동을 애써 무시하고자 한다. 그 지각변동을 일으킨 정치성을 얄팍하고 하찮은 시도들도 폄훼하는 이상, 이 책은 교양의 타락을 슬퍼하는 전통주의자들의 방만한 훈계 이상의 위상을 얻기 어려을 것이다. 한편 역자들이 정리하여 덧붙인 한국어 참고자료의 경우 양은 풍부하지만 세부 주제에 따른 정리가 미흡하고 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없이 서지사항만 밝히고 있어, 과연 알라디너들의 마이리스트들보다 효과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이 책의 구매 의사가 있으신 분이라면 일단 오프라인 서점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이라도 살짝 들여다 보고, 두고두고 곁에 둘 만한 책인지 잠시 음미해 본 다음에 구매 여부를 결정하길 바란다. 감히 말하건대, 문학이든 철학이든 역사든 이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보다 더 충실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안내서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역자 서문과 저자 서문은 괜찮은 조언들을 제법 담고 있긴 한데, 이미 강유원의 책을 몇 권 접한 이에게는 그 역시 새로운 내용은 아닐 듯싶다. '고전' 읽기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 읽기]를 고르기 바란다. 훨씬 유용하고 재미있으며, 정치사상 텍스트를 다루고 있음에도 인문학 공부에 관련하여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이 제법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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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oo의 생각
    from roo's me2DAY 2009-01-22 14:11 
    서구중심적인거야 그렇다쳐도,20세기 중반 이후에 등장한 다양하고 풍성한 이론적 성과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이에 '대단히 적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모습은 이 책이 옹호하고자하는 인문학과 교양의 가치를 무척 의심스럽게 한다.-제 소감도 이와 같습니다
 
 
limelight 2009-01-22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들춰보지 마시고 한번 세심하게 읽어보시면 조금 생각이 달라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문구 이외에도 많은 문구들이 이 책에서 와닿았는데, 인문학 공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온 이들의 생각과 태도라서 그런지, 그리고 "어떤 커리큘럼도 모든 커리큘럼을 포괄하진 못한다... 핵심커리큘럼을 끝내면 여러분은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에만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헀던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심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는 원저자의 말처럼 한번에 모든 것을 다 얻으려는 욕심을 버려서인지, 인문학적 통찰력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소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시각에서 인문학 본래의 보편성 추구의 목적을 느낄 수 있어서 오히려 신선했구요.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의 다양한 성과들을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이 책에 나온 기본적인 인문학 공부를 한 후에 그것들을 공부해도 그리 늦지 않기 때문일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그런 것들까지 다루면 정말 과욕이기 때문일 것 같기도 하고요. 20세기 중반 이후의 위대한 학자들도 이 책에 나온 고전공부를 먼저 하고 그런 이론들을 세울 수 있었을테니까요.

"플라톤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는 바로 플라톤의 저작이다. 플라톤에 관해 쓴 다른 저자의 책, 즉 2차문헌을 거치지 말고 먼저 원전을 읽는 것이 좋다."

"철학이 최고라는 플라톤의 주장에 도전할 시인이 있다면 그는 바로 셰익스피어다. 그의 시선은 인간의 넓은 세계 전체에 뻗어 있는 동시에 인간 감성의 가장 깊숙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세계는 인간과 신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더 정확하게는 인간 집단과 인간 집단의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변화하였다.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대립과 투쟁은 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세계를 파악하는 기본적인 입장 중의 하나이다."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작품들을 읽어라. 그것은 문명화된 영혼의 가장 확실한 표지다."

"과학이 역사적 과정 속에 처한 인간들의 세속적 활동이라 해서 과학이 거둔 놀라운 성과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것이 진실임을 과학사는 밝혀 왔다. 과학이 거둔 놀라운 성과에 담긴 역사성을 올곧게 이해하려는 것은 그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과정에서 빚어진 빛과 어둠을 모두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이다. 이는 과학의 가치를 부정하기는커녕 과학의 문화적 유산을 긍정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다."

"모든 경제사상은 나름의 방식으로 풍요와 부의 증진, 자유, 평등 모두를 추구한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부(개인적인 부냐, 사회적인 부냐, 그리고 화폐 자본이냐, 실질적 재화냐), 어떤 종류의 자유(재산권의 자유냐,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냐), 그리고 어떤 종류의 평등(투표권에 국한된 정치적 평등이냐, 물질적 삶의 경제적 평등이냐)을 선택할 것인가이다."

사량 2009-01-2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imelight님 /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님이 인용하신 "어떤 커리큘럼도 모든 커리큘럼을 포괄하진 못한다"라는 말에 적극 동의합니다. 오히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의 시각이 못마땅한 겁니다. 자신들의 견해 역시 특정한 관점에 따른 선별과정을 분명히 지니고 있을 텐데, 그 견해를 불변하고 보편타당한 것인 양 제시하고 있거든요. 님께서 셰익스피어와 관련하여 인용한 "그의 시선은 인간의 넓은 세계 전체에 뻗어 있는 동시에 인간 감성의 가장 깊숙한 움직임을 포착한다"라는 문장만 봐도, '인간' '세계' '감성'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단일한 개념인가 하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영미소설을 거론할 때 유일하게 언급한 제인 오스틴의 경우도 그래요. "문명화된 영혼의 가장 확실한 표지"라고 하는데, '문명화'라는 말부터가 아주 음험한 말인데다가 저렇게 막연한 말로 수식할 수 있는 작가가 과연 제인 오스틴뿐이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역시 20세기 중반 이후의 이론들에 힘입을 필요가 있는데, 이 책의 저자들은 비아냥으로 일관할 뿐이지요. 그 이론들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인문학과 교양을 근본적 차원에서 심문하는 그 문제의식을 존중할 필요가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 감정적이고 동어반복적인 '권위에의 호소'에 머물기 십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20세기 사상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삼총사' 가운데, 뒷부분에 단편적으로 몇 차례 언급되는 맑스를 제외하고 니체, 프로이트가 본문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는 책을 권하기란 저로서는 쉽지 않네요.

limelight 2009-01-23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문학 정신이 무엇이냐 혹은 고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부터가 그 사람의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볼 때, 저는 이 책에 동의하는 편이고, 님은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 같기도 합니다. 저 역시 니체를 포함한 근현대 학문을 위주로 공부했지만 인문학 정신의 토대는 고전에 담긴 보편성이라고 보고 있으며, 고전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이 책에서 언급된 범위 정도면 타당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온 책들만 공부해도 석학이 될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능력만 된다면 니체를 공부하기 이전에 니체가 깊이 연구했던 희랍고전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게 제 욕심이기도 하고요. 물론 이후에는 지금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와 시대를 이해할 좀더 세부적이고 다양한 이론들도 공부해야겠지요. 이 책의 저자도 자신의 견해(미국의 모든 대학의 교양교육 커리큘럼을 조사한 것이고 유명 교수들을 직접 인터뷰한 이후에 쓴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 자체가 그만의 주장이 아니기도 합니다)가 보편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제시하는 위대한 고전들이 보편정신(보편타당성이 아니라)을 추구했다는 것을 잊지마라는 뜻으로 저는 읽었습니다.

this 2009-02-2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량/ 고견 잘 봤습니다. <인문학 스터디>의 강연회가 있었는데 녹음파일이 올라왔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다운받아서 들어보셨으면 합니다.

아래는 다운 주소입니다.
http://allestelle.net/resources/2009/02/02/1172

사량 2009-02-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길어서 전부 듣진 못했지만, 여전히 강유원 선생은 정력적이고 유머가 넘치네요. ^^ 다만 어느 분의 서평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조금 듣기 거북했답니다.
 
두두 문학과지성 시인선 34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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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어떤 대상의 '본질'을 밝히고자 한다면,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 곧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것이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구별해내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다른 대상에도 존재하는 것들, 다시 말해 그 대상에만 고유하게 속하지 않는 것을 없애버리면 된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고갱이를 아마 본질적인 것, 아니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게다.

오규원의 유고시집 [두두]는 그렇게 해서 언어라고 불리는 것의 환원 불가능한 본질을 우리에게 아름답고 섬뜩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언어 사용자인 인간에 의해 속속들이 의미화되지 못한 어느 경지 너머로 언어 그 자체가 자유로이 펼쳐놓는 세계가 마치 피안의 우주인 양 더없이 오묘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섬뜩한 이유는 그 낙원이 아무리 미세한 현미경을 들이댄다 한들 인간이 죽었다 깨어나도 다가갈 수 없는,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 결코 전부가 아님을 담담하면서도 강건하게 역설하는 내밀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물질성이라는 날줄과 씨줄로 모든 인간적인 의미들을 걸러내고 남은 자리에는 언어가 제 스스로 노닐고 사랑했던 흔적들(나는 '노닐고 사랑했던'이라고, 과거형으로 썼다. 그 이유는 곧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로 가득하다. '어둠은 '제비꽃'을 만드는 걸로 모자라 그 밑에 "제비꽃의 그늘도/하나 붙여놓"는가 하면(10쪽),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이파리는 제가 떠나온 그곳을 하늘에게 부탁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36쪽) '구멍'이라고 하는, 장자부터 시작해서 많은 문학도와 철학자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던 탁월한 사유대상은 "지나가는 새의 그림자가 들어왔다가/급히 나와 새와 함께 사라"(56쪽)짐으로써, 인간들이 사로잡아 의미를 부여하고 또 낱낱이 파헤칠 여지 자체를 앗아가 버린다. 그럼에도 인간 세계를 벗어난 '순수' 언어의 움직임과 질서는 별다른 꾸밈을 필요치 않는 정갈하고 단정한 것이어서, 인간에게 포섭된 언어들이 해석과 전달의 욕망에 짓눌려 토해내는 장광설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이 시집에는 10행 이상 되는 시가 거의 없으며, 각 행도 지극히 짧게 정제된, 군살 빠진 뼈만, 아니 뼈도 사라진 근육만을 남긴 채 최소한의 언어로 무한히 충만한 공간을 만들어나간다.

물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온갖 의미들을 덜어내고 사물로만 남은, 또는 추상으로서만 남은 언어의 물질성이 시집 전체에 도드라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작 사물이나 추상을 의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그런 의혹을 전혀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의인화란 하나의 존재가 된 언어의 무한한 활동들을 그저 인간들이 간편히 이해하기 위해 덧씌우는 거추장스러운 해석이 아닐까? 다시 말해 사물이 된 언어라는 존재를 인간에 대한 비유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언어 고유의 세계를 낯설고 기괴한 무엇으로 파악한 나머지, 이를 친밀하고 편안한 세계로 길들이고자 사후적으로 가하는 폭력이지 않을까? [두두]에서 언어들은 '있음'과 '움직임'으로서 나타나되, 성별도, 부모도, 자식도, 국적도 없다. 뿌리도 없이 막되먹은 이러한 서자들의 세계가 불편하다면, 그 속의 예측 불가능한 관계들을 모조리 인간적인 질서로 바꾸어 이해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언어들의 난장이란 하나의 결과물일 뿐, 우리의 의미체계가 물질적 언어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는가?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언어란 결코 투명하지 않고 중립적이지도 않은 인간중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의 언어가 무력해지는 사태에 직면하였을 때 이를 익숙한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대놓고 폭로하는 셈인 것이다. 본질로서의 언어가 생동하는 우주는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는 곳에 자리한다. 다만 그들이 왔다가 사라진 놀이터만을 뒤늦게 발견할 수 있을 뿐.

일견 선(禪)적인 세계로 보이기도 하는 [두두]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 어느 시집보다도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온갖 잡스러운 말들이 절제되지 않은 채로 횡횡하는 오늘 그리고 이곳에서,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치의 시공간을 수놓은 [두두]의 세계는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롭다.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시 창작법을 저술한 섬세하고 날카로운 문예교수이자, 김수영과 김춘수와 더불어 '시론'이라고 불릴 만한 방법론을 탄탄하게 구축한 한국현대시사의 몇 안 되는 시인이론가(이런 말도 있나?)였던 오규원은 유고시집이 단지 미발표된 (태작이 대부분인 경우가 많은) 습작들을 한데 모아두는 것 이상이 될 수 있음을 또 하나의 선례로 남겼다. 이 땅의 젊은 시인들이여, 오규원을 배우라. 오규원만큼 언어에 치열하게 매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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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9-0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너무 어려운 리뷰예요. 다음에 낮에 와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시 읽어야겠네요
근데 첫 줄은 참 와닿네요. 대상의 본질에 대해 알려면.. 음... 맞는 말 같아요. 나의 본질부터 알기 위해 없어도 될 것들을 없애보는 연습을 해야겠네요. 그럼 알 수 있을까요? ^^

결혼식 잘 치루고 신행도 잘 다녀오고 신혼집도 다 정리하고.. 인사드리러 왔어요. 잘 지내세요? ㅋㅋ
 
리스본行 야간열차 문학과지성 시인선 34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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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사랑하던 황인숙은 끝내 고양이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기를 멈추고/쉬는 시간이다"라고 일갈하더니, "기와 지붕, 슬레이트 지붕, 콘크리트 지붕, 천막으로 덮인 지붕,/굽이굽이 지붕들의 구릉과 평원을 굽어"보는 사이, "사람이기를 멈춘 내/영혼에 이빨이 돋는다"며 고양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아는 이 모두를 저버"리며 "기울어진 지붕, 흔들거리는 처마,/말하자면 기우뚱함에, 그리고 지붕과 지붕 사이의 허공"에 "환장"하는, "空中空間의 활용자인 고양이"임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고양이로 거듭난 그녀는 가볍고 활달하고 유쾌하다. 인간일 적 가졌던 약간의 음울함과 적적함도 다 떨쳐 버린 것 같아 부럽기까지 하다.

대신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 황인숙은 파삭 늙었다. 고양이를 자임하는 시편들 외의 작품들은 평범하다 못해 지루해졌고, 나이가 든 만큼이나 시의 피부도 그녀 특유의 탄성과 긴장이 사라져 버석거린다. 마흔 살을 넘겨 펴 냈던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나 [자명한 산책]만 해도 전반적인 정조야 어쨌든 시의 탄력만은 첫 시집 못지않게 팽팽히 유지하고 있었기에, 황인숙이야말로 한국 시인들의 고질병인 조로증을 극복한 예외적인 시인이라고 내심 생각했건만, 조금 안타깝다. 그녀가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풍경에 보내는 연민과 애정 어린 시선들에 울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울림은 고양이의 삶에서 풍기는 가벼움과 대비되며 청승맞게 다가온다. 늙어가는 한 시인의 내면풍경이 그렇다면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겠으나, 고양이의 눈으로 쓴 시와 달리 인간의 눈으로 쓴 시는 시가 되지 못하고 날것의 정서로만 남은 것 같아 민망하다.

어차피 시인도, 독자도 늙어가기 마련인데, 왜 예전처럼 젊게 시를 쓰지 못하냐고 나무라는 건 부당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자기가 좋아서 고양이가 된 시인에게 왜 인간의 시선으로 쓴 시의 정서 환기력이 예전만 못하냐고 뭐라 하는 것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볼멘소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이런 반응을 원하고 야생고양이마냥 지붕만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만큼 우리 삶은 비루하고 재미없다는 것, 그러니까 고양이처럼 심드렁하면서도 고고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 그러나 우리네 삶은 지질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어서 고양이처럼 초연하고 가벼운 유유자적한 삶을 그냥 두지 않는다. 한가하게만 보이는 고양이가 사실은 "잔인하고 무정한 이 거리에서/구사일생으로 살아가"며, "도둑고양이, 길고양이, 골목고양이"라는 낙인 속에 인간들에게 "시끄럽다, 더럽다, 무섭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는 건 그 때문이다. 황인숙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해보세요, 어느 편이 진짜 그런지." 그리고 덧붙인다. "고양이들이 사라진 동네는/사람의 영혼이 텅 빈 동네입니다./이만저만 조용한 게 아니겠지요./그러면, 좋을까요?" 좋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게 만든 건 고양이가 된 황인숙과 이 시집의 힘이다. 그럼에도 고양이가 된 황인숙이 인간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잔인한 부탁이겠지만, 예전처럼 인간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젊고 활기차게 노래해 줬으면 좋겠다. 리스본에서 쓴 시들처럼 늘어지지 말고. (그러고 보니 몇 편 되지도 않는 리스본 여행시편과 관련해 시집의 제목이 정해진 이유를 생각해 보지 못했다. 정말 이기적이고 애정 없는 독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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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3-15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긴한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ㅠ_ㅠ
그래서 저도 추천으로 대신합니다. 으흐

잘지내시죠? :)

비로그인 2009-01-21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집을 읽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소설 '리스본 행 야간 열차'에서 일상에서 벗어난 주인공을, 말씀하신 시집의 내용으로 비교하자면 사람에게서 벗어난 고양이와 같은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키고자 했던 저자의 의도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론 이후 삶 - 데리다와 현대이론을 말하다
자크 데리다 외 지음, 마이클 페인.존 샤드 엮음, 강우성.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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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이후 삶]은 이 책의 편집자가 자크 데리다, 프랭크 커모드, 크리스토퍼 노리스, 토릴 모이, 이렇게 네 사람의 거물들과 개별적으로 진행한 대담 및 토론을 모은 책이다. 영미 학계에서 문학 연구의 주류로 부상한 뒤로 한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다 최근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는 '이론 연구'의 공과를 되짚고, 이론 및 이론의 쇠락이 가져올 문학 연구의 변화가 어떠할지 모색해 보는 기획에서 마련된 대담집이지만, 네 사람이 각자 삼고 있는 화두는 조금씩 다르다. 데리다의 경우 이론, 위증, 약속, 유령, 여성, 윤리, 종교, 책임 등 자신의 관심사를 두루 들춰보이고 있고(그러나 토론의 전제가 되는 데리다의 강연문이 빠진 채 강연 다음 날의 토론문만 들어 있어 감질만 오르게 한다), 노리스는 문학과 철학의 관련상 및 해체론에 대한 속류적 이해가 불러왔던 폐해들을 논의하는 데 집중하며, 모이는 페미니즘 일반과 자신의 지적 여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이론의 보편성과 정치성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데리다의 사진과 서명을 큼지막하게 박아넣은 이 책의 표지는 부당하고 또 뻔뻔하다. 데리다가 참석한 토론문이 분량상으로는 가장 많고, 나머지 세 사람의 대담에서 데리다가 빠짐없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 모든 논의들을 데리다만의 것으로 포장하여 마치 데리다의 책인 양 팔아먹으려는 시도는 얄팍한 상술이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황당해서 원서 표지를 찾아 보았더니, 거기에는 특정 인물의 사진 같은 것 없이 데리다와 커모드, 노리스와 모이의 이름이 똑같은 크기와 글자체로 공평하게 찍혀 있거늘, 이 무슨 몰염치인지. (물론 번역본에도 오른쪽 하단에 대담 참여자가 '공평하게' 적혀 있기는 하다.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옮긴이들 이름은 번역의 노고가 무색하게 정말 작은 글씨로 써놨다;;) 책을 펼쳐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보면 또 한번 실소를 머금게 된다. 데리다의 주요 저서가 "[그라마톨로지], [에코그라피], [시네퐁주], [글쓰기와 차이], [법의 힘]"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에코그라피]와 [시네퐁주]는 각기 나름의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지만, 70여 권에 달하는 데리다의 저서 가운데 두세 번째로 언급될 만한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저 책들을 데리다의 대표작으로 굳이 거론한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저 두 권과 [그라마톨로지]는 이 책을 출간한 '민음사'에서 발행한 바 있는 책들인 것이다! '발행한 바'라고 쓴 건 공교롭게도 세 권 모두 절판되어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라마톨로지]는 동문선에서 새로 번역해서 냈다)어차피 자기네가 새로 펴내지도 않는 책들인데, 쉽게 살 수 있고 또 중요한 저작인 [목소리와 현상]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대신 저 책들을 소개글에 집어넣을 필요가 있나. 한마디로, 가증스럽다.

이른바 '이론가'들의 저작이 상대적으로 잘 팔린다는 알라딘에서조차 세일즈포인트가 그리 높지 않은 걸 보면, 현재까지 이 책의 전체 판매량은 퍽 저조할 것이고 이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데리다의 저작처럼 몇 년 뒤 절판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데리다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이 상술이라는 내 말은 틀린 셈이 된다!) 그러나 판매량의 저조한 이유가 출판사 측의 가증스러운 태도가 밉기 때문은 아니다. 판매 부진의 이유는, 이 책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는 "문학 이론, 곧 우리 세계에 대한 '사유'는 벌써 왔다 갔고, '본격' 이론의 전성기도 지나가 버린 듯하다"(5쪽)라는 편집자의 말 자체가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리 적실하지 않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겐 잠시 반짝하는 유행이란 게 있었을지는 몰라도, "'본격' 이론의 전성기"는 없었다. 들뢰즈와 푸코, 그리고 지젝 정도를 제외하면 이론가들의 주저조차 번역이 안 된 경우가 허다한데, 다시 말해, 이론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촉구될 정도로 학계가 이론에 지배된 적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이론 이후'를 들고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황당하다. 게다가 이론의 정치성이 대학 제도 속으로 편입되면서 특유의 창조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린 영미권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이론 연구가 대학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대학 밖의 자생적 연구공간에서 더욱 심도 있게 논의되어 온 까닭에, 오히려 이론 본연의 면모가 더욱 충실히 발휘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지난 수십 년간의 지적 흐름들을 철저하게 영미권의 맥락에서 돌이켜 보는 이 책이 한국에서는 내용의 질과 무관하게 조금 뜬금없게 읽힐 수밖에 없다. 대학 정식 교과과정에서 ('문학'만을 위한 이론이 아닌) '이론'을 접할 기회가 여전히 흔치 않은 듯한 이 땅의 문학 전공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론 이후'의 삶이 아니라 좀더 '이론과 함께하는' 삶이다.

뭐, 이 책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영미권 학계와 관련된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으며, 레비나스를 바라보는 데리다의 입장 변화에 관한 노리스의 조심스러운 우려나 보부아르 및 실존주의를 흥미롭게 재조명하는 모이의 시도 등은 해체론과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귀 기울여 볼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책꽂이에 꽂아두면서 두고두고 펼쳐 볼 책은 아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며칠 전 모 인터넷헌책방에 이 책이 '새책수준'이라는 참고사항을 달고 판매되고 있는 걸 보았다. 초판이 작년 8월에 나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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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9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0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 (SLAM DUNK 10 DAYS AFTER)
이노우에 다케히코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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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슬램덩크]의 일본 판매부수가 1억 권을 넘겼다. 이에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독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그는 [슬램덩크]의 주요 등장인물 여섯 명의 일러스트를 그린 뒤, 이를 일본의 6대 대표일간지에 자비를 들여 전면광고로 게재했다. <요미우리신문>에 강백호가, 아사히신문에는 서태웅이, <니혼게이자이>에는 채치수가 작가를 대신하여 독자들에게 그간의 고마움을 표했다. 한국의 인터넷매체에까지 이 사실이 보도될 정도로 반향은 엄청났다. 모처럼 [슬램덩크]의 감동을 되살린 독자들은 작가에게 감사인사를 되돌려주었고 작가의 팬사이트는 연일 게시물로 넘쳐났다. 작가는 다시 한 번 고민했다. 이러한 성원과 애정에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지.

전면광고가 나간 지 서너달이 지난 뒤, 작가는 [슬램덩크]의 무대가 되었던 카나자와현으로 갔다. 바다를 끼고 있는 그곳에는, 옥상에 오르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폐교가 한 곳 있었다. 작가는 [슬램덩크]의 주인공들이 다녔을 법한 옛 고등학교 건물을 통째로 빌렸다. 팬들을 위한 마지막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해서. 교실의 모든 책걸상을 치우고 칠판을 지웠다. 그리고 그 칠판에, [슬램덩크]의 결말에서 10일이 지난 뒤의 에피소드를 펼쳐놓았다. 작가는 23개 교실의 칠판에, 그 뜨거웠던 전국대회를 마치고 학교로, 일상으로 돌아온 등장인물들의 짤막한 이야기를 한편 한편 분필로 직접 그렸다. 독자들은 딱 3일간, 분필로 그려진 그들의 후일담을 들을 수 있었다. 23개의 교실을 모두 돌고 나면 옆방에서 [슬램덩크]의 단행본과 애니메이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복도를 건너 체육관을 향하면 농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3일 동안 [슬램덩크]만의 세상으로 사람들을 초대했던 작가는 행사 마지막 날 저녁, 자신이 칠판에 그렸던 이정환과 윤대협, 정우성, 그리고 강백호와 채소연을 직접 지움으로써 이벤트를 마무리했다.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는 이 모든 것들의 기록이다.

책의 내용을 미리 알지 못해 구입을 망설였기에, 나는 어느 도서관을 찾아 서가 한켠에 서서 이 책을 읽었다. 뜬금없게도 눈물을 삼키느라 조금 고생해가면서.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그러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마 각자가 지닌 [슬램덩크]의 기억만큼만, 딱 그만큼만 가슴 뛰고, 감사하고, 용기를 갖게 되겠지. 그러므로 별 다섯 개를 너무 신뢰하진 마시라. 다만 읽기 전에 채소연처럼 한 번만 자문해 보면 좋겠다. "슬램덩크...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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