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쉼표가 적은 일본 소설 같은 느낌이다. 세련된 척 공허한 주인공은 에쿠니 가오리의 그녀들과 닮았다. 그러나 확실히 일본 작품과는 또 다른, 어떤 느낌이 있었다. 한국 작품도 아니고, 미국 작품도 아닌, 1.5라는 애매한 위치의 소설.
하지만 통역사는 그림자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게 통역의 키포인트이다. 그녀는 진실을 듣는 유일한 존재이며 비밀을 지키는 사람이다. (20쪽)
하얀색은 슬픔, 추억, 고향의 색이니까. 수지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마다 하얀 천이 달린 핀을 꽂는 이유를 물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114쪽)
수지는 지방 검사보의 이야기를 들으며 중요한 단어를 수첩에 적는다. 통역을 할 때는 아무리 문장이 길더라도 모든 단어를 정확히 옮겨야 한다. 통역사는 수학자하고 비슷하다. 그녀는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언어를 대한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동의어와 맞추어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정답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수지는 예전부터 이런 방면에 소질이 있었다. 두 가지 언어를 쓰면서 자란 환경 때문은 아니엇다. 이민자 자식들이라고 해서 다들 통역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수지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이 있다. 그녀는 단어를 들으면 사전적인 의미와 함축적인 의미를 분리한다. 직역은 오역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어는 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통역사는 단어를 그대로 옮기면서도 이쪽 언어와 저쪽 언어 사이의 간격을 교묘히 메울 줄 알아야 한다. 통역을 할 때 그녀의 한쪽 머리는 단어를 자동 전환하고 다른 쪽 머리는 자동 전환에 따른 빈틈을 체크한다. 통역은 정확하면서도 독창적인 자세가 필요한 기술이다. 2에 2를 더하면 단순히 4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의미가 될 수 잇음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해결사이다. (144쪽)
그 당시에는 취직이 힘들었어. 1970년대 후반이었으니까. 사람들은 1970년대가 한국의 경제 부흥기라고 하지만 그때 몸집을 불린 회사는 삼성, 현대, 대우 같은 재벌뿐이었지ㅏ. 나 같은 노동자야 희생양이었고. 중소 기업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어. 은행 대출, 금리, 거래 규정 등 모든 면에서 불리했으니까. 그런 때였지. 좋은 시절이 오길 기다리거나 한국을 뜨거나 양자택일을 하는 수밖에 없는. (242쪽)
"대학교 때 우리 과에서 빈센트에 푹 빠진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다들 나더러 고리타분하다고 놀리더라고. 반 고흐를 좋아하거나 초급 회화 수업에서 그를 연구하거나 첫번째 숙제로 「별이 빛나는 밤」을 흉내내서 그릴 수는 있어도 푹 빠질 수는 없다는 거야. 모두들 몬드리안, 보이스, 뒤샹으로 옮겨가도 나는 지조를 지켰지. 지금도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가슴이 뛰어. 「사이프러스」를 보면 눈물이 나고. 예전엔 매일 밤마다 잠이 들기 전까지 그가 남긴 편지를 읽었는데."
수지는 두 사람이 함께 살던 시절, 케일럽이 항상 입고 다녔던 하늘 빛 볼링 재킷을 떠올린다. 재킷의 오른쪽 주머니에는 '빈센트'라는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그런데 수지는 예전 남자 친구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한 사람을 알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하지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비밀을 감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462, 4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