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에 대해 관심도 없고, 역사적인 내용도 아는 바가 없는 나는 이 책이 참 버거웠다. 소백온의 <문견록> 이나 여씨의 <가숙기> 등에서 고인의 자잘한 일들까지 기록한 것을 본떠 저술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연암의 행적들 중 소소한 것까지 모두 쓰여 있었다. 근엄한 글보다는 나은지 모르지만 고인을 기억하려고 책을 읽은 게 아닌 나로서는 읽기가 힘들 수밖에. 그래도 교과서에 등장하는 과거의 인물이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작은 일들까지 들춰보는 것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내 눈을 끈 것은 ‘글’에 대한 박지원의 태도였다. 문장가였던 연암에 대한 글이라서인지 글쓰기에 대한 태도가 많이 보였는데, 연암의 기개와 고고한 인품 같은 것보다도 더 와 닿는 말이 많았다. 특히, 요즘 내가 고민해 마지않는 글읽기와 글쓰기에 대해, 그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네들이 책을 읽는 데에 부지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글의 뜻과 이치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세. 평소 과거시험의 글을 익히던 버릇이 종이와 입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 그것을 벗어나 사색하지 않기 때문이지. 자네들이 진실로 나를 따라 배우고자 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과정을 정하도록 하게. 그리하여 매일 경서 한 장과 주자의 강목 한 단을 빨리 읽거나 외우려하지 말고, 자세히 음미하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토론, 분변함이 좋겠어”(41, 42쪽)
빨리 읽거나 외우려하지 말고, 라. 뜨끔했다. 요즘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글 읽는 속도를 빠르게 하고 책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인데. 책을 읽는 이유와 방식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당연하고, 어떤 이유로 읽더라도 부끄러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박지원에 대한 책 또한 그런 목적으로 손에 쥔 것이 부끄러워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연암은 책 읽는 속도가 느렸다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와 연암은 큰 차이가 있다. 그는 위와 같이 자세하게, 사색하며 글을 읽었기에 느렸으나 나는 단순히 읽는 속도가 느린 것일 뿐 내용을 아는 것 이상의 발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험을 치면 문제는 풀 수 있지만 말은 한 마디도 못 하는 전형적인 바보가 되는 게 아닌가.
이런저런 대단한 일을 했다고 내세우는 것보다 작은 사건들을 알게 함으로써 고인을 기억한다는 이 책의 취지는, 나에게 과거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 속에 남은 그의 이름의 곁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한반도와 이 세계의 과거에 대한 신뢰감이 갑자기 높아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전까지 알던 ‘역사’가 그저 기술된 자료에 불과했다면, <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통해 그 속에 있는 사람들과 시간에 대해 실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지원의, 인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다.
◆글에 대해 몇 마디 더 적어보자면
“옛을 본뜨는 사람은 그 자취에 구애됨이 병폐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법도가 없음이 폐단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서도 법도가 있다면 지금의 문장은 옛 문장과 같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자구가 아름다운가 속된가 하는 것만 따지거나 한 편의 글이 고상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만 문제 삼는 자들은 비유컨대 마음속에 아무런 계책도 없는 용기 없는 장수와 같아서 갑자기 글제목을 대하면 우뚝 솟아 있는 견고한 성을 눈앞에 만난 것처럼 당황한다. 그러므로 글 짓는 사람의 걱정거리는 늘 스스로 길을 잃어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할 것이다.(180쪽)”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