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사촌동생이 많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는 단 두 명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병이 아니라 장애'인 자폐증의 동생 둘밖에는. 그리고 초원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들과 겹쳐보였다. 명절날 갑자기 없어져서 찾아헤맨 일이나, 나보다 한 스무배는 느리게 가는 것같은 그 동생들의 정신 시계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초원이 엄마가 아들과 웃고 있을 때면, "아이구, 승욱이/혜경이 말이 많이 늘었네요"라는 말이 몇 년 동안이나 최고의 인사말인 작은엄마와 외숙모의 얼굴이 대신 다가왔다. 지금은 열살을 조금 넘을 뿐이지만 그 애들도 얼마 안 가 초원이와 같은 스무살이 되고, 서른이 되고, 점점 더 나이를 먹어 갈 것이다. 어떤 삶을 살까? 그 삶은 기쁠까? 슬플까? 화가 날까? 겁이 날까?

  이렇게, <말아톤>은 이미 초원이의 이야기를 넘어서 있었기에, 나는 영화의 시작부터 울었고, 마지막에도 울었다. 자그마한 미소로 잡아낸 일상과 그 속에 펼쳐지는 초원이의 드라마는 내 감동샘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웃고 있으면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나고, 울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는, 그런 식이었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해주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승우는 눈동자나 표정 하나까지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김미숙의 미소에 스민 고단함이나, 이기영의 느낌이 변화하는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해신>의 장보고 아역으로 나왔던 백성현도 중원이 역을 잘 해 주었으며, 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모습도 영화속에 잘 녹아있었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초원이의 첫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꼽겠다.
  초원이는 42.195km의 마라톤을 시작한다. 엄마의 손을 놓고 달리기 시작했지만, 체력의 한계에 다다르게 되고 결국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버린다. 그 때, 지친 초원이의 눈 앞에 초코파이가 나타난다. 그것을 받아든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엄마가 언젠가 손가락으로 느끼게 해 줬던 바람을 맞으며 달려간다. 그리고 비가 주륵주륵 내리기 시작하자, 초원이는 손에서 초코파이를 놓는다. 치타처럼 신나게 달려나가는 그의 손에는 초코파이 대신 사람들의 손바닥에 닿게 된다. 엄마의 초코파이를 놓은 손이지만, 그 자리는 결코 무(無)가 아닌 것이다. 속으로 '우리 초원이, 잘한다. 우리 초원이 장하다!'라는 칭찬을 끊임없이 외쳐댔다.  최고로 희망적인,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장면이었다.

  그다지 즐겁지 못했던 <역도산>, <알렉산더>와 같은 실화 영화 두 편과 비교했을 때 <말아톤>은 확실히 우위에 있다. 왜? 역도산과 알렉산더의 삶은 스스로가 일으키는 싸움으로 가득차고, 그 죽음마저 허망했지만, 초원이의 싸움은 사회가, 타인이 일으키는 것이며, 여전히 살아있어서 더 멀리 더 오랫동안 달릴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자기 손을 물어뜯는 아이었던 초원이가 지금은 청년이 되어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것은 어떤 후련함마저 준다.

  아, 말아톤. 집에 돌아와 영화표에 '세렝게티 초원의 얼룩말, 초원이'라는 말과 함께 별 다섯개를 꼼꼼히 그리고 나서도, 여전히 말아톤은 내 마음속에서 끝나지 않고 있다.


▲ 이 장면도 무척 좋았다.


▲ '스마일'을 배우기 전의 사진.

  작은엄마와 외숙모는 이 영화를 보실까? '마음속에서 끝나지 않고 있는' 것과 '현실속에서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의 차이는 굉장히 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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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룸 2005-01-31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이영화 넘 보고싶어요, 저 포스터 참 이쁘네요^---------------^ (그와중에도 '저 얼룩말이 진짤까?'궁금하기도 해요^^a)

明卵 2005-02-01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쁘죠. 포스터보다 영화가 더 이뻐요^^ 저도 어제 그 생각(얼룩말이 진짤까)했는데, 어쩐지 아닐 것 같은 건 왜일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