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 그 부담에 내가 지금까지 죽어라 피해왔던 타이틀이다. 1학년 때는 "기권하겠습니다" 라고 했고, 2학년 때는 "반장같은 이름 안 걸어도 열심히 할테니까 제발 내 이름은 피해서 적어달라"고 했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죽어라 피해왔듯이 나의 모든 담임 선생님들은 죽어도 나를 반장선거에 출마시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셨고, 나는 일단 교탁앞까지는 나가야 했다.) 하지만 중학 생활도 마지막을 맞을 올해에는 한 번 도전해 볼까 생각중이었다. 반장보다 내가 하는 일이 더 많다는 걸 깨달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록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게 억울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올해는 하필이면 반에 쟁쟁한 후보들이 너무나 많다. 오죽하면 1반에 공부 잘 하는 인간 다 모였다고 하겠는가. 성적 순으로 돌린 것이므로 등수는 공평할 것인데도 그런 말이 나온다는 건 분명 우리 반 친구들이 이름을 많이 떠치고 다녔다는 얘기가 된다. 초등학생때부터 한번도 반장을 안 한 적이 없는 친구며 (이 녀석은 지금까지 5년을 나와 한 반 했으므로 잘 안다) 전 부반장에 회장선거 출마자까지. 내가 선생님들과 돈독한 사제의 정을 쌓고 있던 동안 주위 친구들로 인맥의 산맥을 만들던 애들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2년간 한번도 같은 반이 아니었던 친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3학년 1반. 내 얼굴은 지나가면서 스쳐보고 내 이름이라곤 기껏해야 상장받을 때나 들어봤을 그런 친구들에게서 표를 바랄 수 있을까?
나는 재미있는 인간이 아니다. 조용하게 입 닥치고 산 1년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남의 대화에 웃는 것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반장 후보들 중에 많은 친구들은 유쾌하고 재밌음으로 정평이 나있다. (분위기 메이커란. 진심으로 존경한다.) 선생님이 아닌 학생의 관점에서 좋은 반장은 그 아이가 일을 얼마나 잘 해 내느냐 마느냐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좋은 반장은 자기가 땡땡이 치면 얼굴 색 하나 안 바뀌고 선생님께 둘러대 줄 수 있는 사람, 적당히 웃기면서 반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다. 후자는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내 입이 삐뚤어져도 못 한다. 모든 규칙이 질서정연하고 깔끔하게 지켜지지 않을 때 나는 당황하고, 또 무력해진다. 갑자기 작년 수학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하명란, 대체 니가 못 하는 게 뭐고?" "많은데요." "(친구들) 체육 못 해요." "음... 그래. 아무튼 세상은 참 공평하쟤. 1등이 반장까지 해먹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살 맛이 나겠나? 그렇쟤?" 그때는 피식 웃고 넘어갔는데 이런 순간 떠올라서 나를 약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다니. 지금 나는 그럴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고 있다. 선생님의 말씀이란 강력하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떨어질 것이다. 확률은 너무나 희박하고, 나는 학기초부터 뭔가에 실패하고 싶지 않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답은 간단하다. "일단 부딪히고 본다". 달리기를 시작해서 죽을만큼 힘들어질 수도 있고, 어쩌면 부상입은 채로 출발점에 있는 응급실에 실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분명 후회하겠지. 내가 왜 달렸을까! 하지만 만약 처음부터 아예 달리지 않았다면, 내가 저 도착점에서 웃고 있을 수도 있었는데... 하며 후회할 게 뻔하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는 나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어떤 일을 시도해 보지도 못했을 때 하는 후회보다 덜 처량하고, 덜 자존심상하고, 덜 멍청하다.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뽑히면, 나는 확실하게 잘 해낼 자신이 있으니까.
후... 그나저나 성실하게 열심히 하겠다는 것만으로는 어필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나를 포장하면서 거짓말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예를 들어서 재밌는 한해를 만들어보겠다느니 하는 말을 내가 한다면 황당무개한 헛소리가 될 뿐이다.) 무슨 말을 해서 표를 끌어들이지? 너무 경박해서는 안 되고 너무 무게잡아서도 안 된다. 머리를 굴릴 때인데, 진지하게 선거에 임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