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은 하루 중 가장 슬프다. 그건 춥기 때문이 아니다. 저녁이라는 허방다리를 딛는 것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길 끝은 이제 막 영화가 끝난 거대하고 검은 영사막처럼 보인다.
...
우린 다들 초조해서 무언가를 한다. 심심해서 혹은 심심함이 불편해서. 아니, 초조는 심심함과는 전혀 다른 무엇을 갖고 있다. 심심한 것과 초조한 건 다르다. 초조는 막연한 무위가 아니고 뭔가 해내야 할 일에 대한 강박증이며 어쩌면 미경험의 처녀이기 때문에 더 강하게 반응하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고, 혹은 무슨 일이든 일어나야 할 것만 같은 느낌. 하지만 경험을 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초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험을 해버리지만 여전히 초조한 것이다. 첫 경험 뒤엔 다름 경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
간혹 어느 날 밤에는 그런 생각이 극에 달하기도 한다. 수면제를 치사량만큼 믹서에 갈아 맥주와 섞어 마시고 만유인력이 지배하는 이 궤도 바깥으로 튀어나가 버릴 수도 있을까.
스물다섯,
스물다섯 살의 여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결혼하는 여자와 여행하는 여자. 그것은 현실의 강박적 요구에 대한 역시 강박증적 욕망일 것이다. 스물다섯이란 나이가 주는 당연한 초조함도 한 몫을 한다.
...
지금 나의 생은 너무 사소해서 이걸 하든, 저걸 하든, 뭔가를 하든, 아무것도 하지 않든 차이가 없다. 하지만 나중엔 차이가 나겠지. 지금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에 의한 아주 큰 차이. 나중엔.
그걸 지금 알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필연적으로 해야 할 것들을 미리 안다면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을 것이다.
...
사랑은 거절할 수 없는 미혹이며, 독이 퍼지는 듯한 도취이며, 백다섯 조각의 처형같은 것일 수도 있다. 사랑이란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독자적 영역이다. 더없이 신성하고 더없이 누추한, 비상이면서 동시에 추락인 이상한 벼랑이다.
...
우리가 명백하게 꿈꾸는 것들은 모두 이루어진다.
그러나 명백해야 한다.
우리가 꿈꾸지 않는 것들에 대해 명백하게 무관심할 것.
서른살,
서 른 을 넘 긴 나 는
어 느 때 보 다 도
아 름 답 고 자 율 적 이 다 .
나는 세속의 금들을 넘어서는 것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서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죄가 되는가 안 되는가는 오직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고 때로 죄책감 따윈 완전히 사양할 수도 있다.
스무 살 땐 누구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식대로 살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검은색 트렁크를 들고 아주 멀리 떠나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생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서른 살에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먼 곳에도 같은 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서른셋,
...
몸 속 의 진 실 을 다 보 고 도
우 린 사 랑 할 수 있 어 야 한 다 .
우 린 늙 어 서 도 ,
아 주 늙 어 서 참 혹 해 진 뒤 에 도
사 랑 을 나 누 어 야 한 다 .
마흔즈음,
수개월 동안 밀폐되어 있다가 드디어 변신에 성공한 나비는 이제 풀입을 먹지 않는다. 꽃즙이나 거북이의 눈물, 사람의 땀을 먹는다. 나비는 코가 없다. 더듬이로 냄새를 맡는다. 입도 없어서, 나비가 된 후로는 전혀 먹지 않는 나비들도 있다. 그런데도 나비들은 광장히 힘이 세다. 모나코 나비는 지구를 반 바퀴나 돈다. 멕시코 계곡에서 겨울을 난 뒤에 유럽까지 날아가는 것이다. 무려 삼천이백 킬로미터를 나는 것이다.
...
우리는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고 실패할 수 있을 뿐이다.
전경린은 스무 살을 그리워 하고,
스물다섯 살을 후회하고,
서른 살을 안타까워하고,
서른세 살을 원망하고,
마흔 살을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