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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단 에쎄이
이상.현진건 외 43인 지음, 방민호 엮음 / 책읽는섬 / 2016년 6월
평점 :
주로 192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사이에 쓰인 45명 문인들의 산문을 방민호 교수가 모았다. 김유정, 박태원, 이상처럼 너무나 유명한 작가들부터 계용묵, 박팔양, 오장환처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들의 글이 담겼다. 누군가 오장환을 누가 모르나?!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적이라는 의미이고, 더 덜 알려진 인물들의 글도 있다.
출판 디자인은 실상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책 선택에 있어서 그다지 주목하지 않아왔던 것인데 이 책은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디자인이 주는 감성에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래된 종이 느낌의 표지에, 휴먼옛체 느낌의 글꼴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디자인이 글이 전하는 시대의 공기와 제법 잘 어울린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것 같다.(다만 뭔가 표지의 잉크가 손에 묻어날 것만 같은 느낌은 책을 손에 쥘 때마다 나를 조금 불안하게 만든다)
이미 1930년대 후반이면 중일전쟁에 접어들며 일본이 전쟁국가로 돌진해 나가던 시기다. 그 시기에 정식 발간되던 잡지에 쓰인 글들인 만큼 대부분의 글들에서는 정치색이 강하게 묻어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소소한 생활의 이야기나 일화, 동료 문인이나 글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김남천은 “냉면이라는 말에 평양이 붙어서 평양냉면이라며 비로소 어울리는 격에 맞는 말이 되듯 냉면은 평양에 있어 대표적인 음식이다”라고 말하고, 이태준은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라고 외친다. 종이에 손을 베이는 ‘사건’으로 글쓰기의 무거움을 느낀 계용묵의 일화나 억세고 귀찮아서 모아서 일자로 자른다는 박태원의 헤어스타일의 비밀을 알게 되면 가장 감수성이 뛰어났던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그 시대를 어떻게 느끼고 버텨나갔는지 간접적으로 느껴진다. 여기에서 간접적이라 함은, 이 책은 아까 말했듯 ‘비분강개’보다는 ‘조곤조곤’의 감성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를 혈서를 썼다’는 김기림의 글이나 ‘조선의 해방은 아무래도 행운이오 감이 저절로 입에 떨어진 격이었다’라는 채만식의 글을 마주하면 마음이 뭉클해지거나 심장이 뜨거워져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보통 이 시기의 재연은 정치적 팸플릿이나 윤색된 시나리오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기록은 그것 자체로 시대의 공기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귀한 매개체다.(그들이 독립투사든 친일파든 그러하다)
책을 읽으며 얻은 더 큰 소득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김유정과 김소월 등에 대해 내가 실제로는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감옥에서 병사한 작가들에 대해 존경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가난이나 우울(등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사연도 충분히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들의 죽음. 그들이 죽음으로 이른 과정이 이 책에서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보다보면 당시 우리의 감성 세계의 ‘영웅’들이 어떻게 찬찬히 무너져내려갔는지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된다.(탐정 소설을 번역해 비용을 마련, 닭과 구렁이를 고아먹고 싶었던 유정의 경우처럼) 그리고 이는 분명, 우리의 역사가 내포했던 고통을 중요한 한 단면을 이룬다.(김소월의 후손들의 사례에서 보듯 그것은 현재와도 이어지는 부분이다)
-2018년 100권 읽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