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나래, 우주인

OO고등학교

Ⅰ. 글밭 나래, 우주인 소개


 OO고에서 일 년 동안 1학년을 가르친 뒤 우리 학교 학생들의 종합적인 사고력과 판단력 향상을 위해 심화활동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2005년 12월말, 독서를 통한 논술/토론 모임을 학생들에게 제안했다. 내 제안을 듣고 지원한 열 세 명의 학생들과 겨울방학 때부터 매주 정기적으로 모인 것이 동아리의 시작이었다.(개학 후 지금의 열여덟 명으로 늘었다.)

 이후 온라인 카페를 개설하면서 학생들이 낸 의견으로 ‘글밭 나래, 우주인’이라는 멋진 모임 이름을 달았다. '글밭 나래, 우주인'은 '책(글밭)을 읽고 자기의 생각을 고르게(토론:나래)하는 모임은 우리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새학기에도 정기적인 독서/토론 활동을 하던 중, 학교의 추천으로 교육청 학습동아리 신청에 응모하여 교육청 지정 학습동아리가 되었고, 지금까지 열일곱 번의 정기모임과 지속적인 온라인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Ⅱ. 글밭 나래, 우주인의 목표


 글밭 나래, 우주인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려는 목표는, 첫 번째 학업성적과 상관없이 책 읽는 습관을 기르고,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을 키우고, 독서를 좋아하고 생활화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책의 내용을 자신의 삶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서 읽은 책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래야 책읽기에 재미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세 번째는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통해 생각하는 능력의 깊이와 폭을 확대하고, 네 번째는 다양한 독후 활동을 통해 토론 및 논술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생 중심의 학습동아리 활동을 통해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향상시키고, 지금의 학교 교육과정에서 쉽게 다룰 수 없는 범교과적인 독서/토론/논술 활동을 바탕으로 통합적 사고력을 키우려는 것이다.


Ⅲ. 글밭 나래, 우주인의 주요 활동 내용


 모임 활동은 자체적으로 선정한 다양한 분야의 필독도서를 교육청 지원금으로 구입해서 읽어야 할 수 있다. 정기모임은 책을 읽어 오고 담당 교사가 미리 제시한 과제를 준비해 와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형태이다. 담당교사는 필독서 선정과 과제 준비에 적극 참여하지만, 정기모임의 진행은 사회자로 선정된 학생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모임의 활동 내용은 크게 보면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모임 전까지 있었던 자신의 생활을 정리해서 2-3분 정도 안에 발표하기다. 이를 통해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 볼 수 있고, 말할 내용을 자연스럽게 구성하고 조직하는 연습을 하며, 조리 있게 말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책에 대해서 토론하기다. 책을 읽고 난 느낀 점 나누기, 궁금한 점 서로 묻기,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말하기, 좋은 구절 소개하기, 시를 이야기로 바꾸어 설명하기 등이다. 세 번째는 책과 관련되어 자신의 생각을 넓히기 위한 활동으로 토론을 할 때도 있고, 상황극(또는 1인극), 논술하기, 시 낭송, 보고서 쓰기, 사례 조사, 그림그리기, 자서전 쓰기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한다.

 예를 들면,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푸른숲, 2005)’을 읽어오고, ‘사형제, 시기상조인가, 폐지되어야 할 악법인가?’를 주제로 찬반토론을 한다. 모임날짜에 앞서 사회자를 정하고 찬/반팀을 나누고, 미리 토론 규칙을 설명한다. 토론을 위해 미리 자료를 찾아서 정리해 오는 과제를 내주고, 모임에서는 사형제 찬반토론을 했다. 토론이 끝나고 모둠 대표는 토론 내용을 정리하여 사형제 찬반에 대한 글을 다듬어 담당교사에게 제출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Ⅳ. 글밭 나래, 우주인 활동 소감


 친구들과 다양한 책을 읽고 고민하고 서로가 생각한 바를 나눈다는 것.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웠다.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모여 각자가 고민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속으로 푹 빠져든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사람들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니까 말이다.[OO고 2학년 O반, 이OO]

 교사로서 뛰어난 재능에다 의욕에 가득 찬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싶다. 학습동아리 활동을 통해 아이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는 일은 참 즐겁고, 보람도 있다. 그래서 학습동아리 활동에 보태는 내 시간과 에너지가 전혀 아깝지 않고, 오히려 학생들에게 더 건네줄 수 없는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을 새삼 자책하게 된다. [글밭 나래, 우주인 담당교사 느티나무]


Ⅴ. 글밭 나래, 우주인의 2학기 계획


 글밭 나래, 우주인의 정기 모임은 이번 여름방학 때도 계속된다. 독서토론 동아리의 특성상 학기 중에 매일 만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방학 중에도 꾸준히 모여서 1학기 때의 활동 내용을 그대로 이어갈 계획이다. 아울러 방학이 시작하면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해서 만든 학습동아리 여름캠프도 다녀올 것이다. 여름캠프도 정기모임의 내용과 형식은 유지하겠지만, 덧붙여서 1학기 활동 평가와 2학기 활동의 세부 내용을 촘촘하게 세울 것이다.

 2학기가 시작되어도 지금의 활동 형태가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조금 더 내실을 다지면 되지 않을까 싶다. 특별히 중요한 활동이라면 내년에 2학년이 되는 학생들에게 독서논술동아리의 중요성과 의미를 알리는 교내 발표회 같은 소박한 자리를 마련해서 이 동아리가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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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나무


- 도종환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건 아니다.

삼백예순닷새 중 꽃 피우고 있는 날보다

빈 가지로 있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행운목처럼 한 생에 겨우 몇 번

꽃을 피우는 것들도 있다.

겨울 안개를 들판 끝으로 쓸어 내는

나무들을 바라보다

나무는 빈가지만으로도 아름답고

나무 그 자체로 존귀한 것임을 생각한다.

우리가 가까운 숲처럼 벗이 되어 주고

먼 산처럼 배경 되어 주면

꽃 다시 피고 잎 무성해지겠지만

꼭 그런 가능성만으로 나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빈 몸 빈 줄기만으로도 나무는 아름다운 것이다.

혼자만 버림받은 듯 바람 앞에 섰다가 엄살떨지 않고

꽃 피던 날의 기억으로 허세 부리지 않고

담당할 수 있어서 담백할 수 있어서

나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게 아니라서

모든 나무들이 다 꽃 피우고 있는 게 아니라서

                                                                            『부드러운 직선』, 창작과비평,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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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님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이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지성사,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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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아이


- 고재종


용골 아이 김순동이는

재 넘고 내 건너는 시오리 학교길

타잔처럼 날래게 뛴다

2학년짜리 그 아이

동무들 하나같이 떠나버려서

하학길엔 냇가에서

홀로 다슬기 송사리 잡고

숨 하나 안 차게 뛰어오르는 산길에선

먹딸기 따고 나리꽃들과 노닥이다

뉘엿거리는 해 동무하여

산막에 들면

지난 겨울 아이와

산노루 쫓다 허리 다친 그 아비

으흐흐흐 짐승처럼 끌어안고

그때쯤이면 칠흑 천지 속으로

알별 잔별 총총

풀벌레 울음 따글따글 영글어

머언 전설 한 태산 내려쌓인다

산아랫말 더벅머리 총각과

눈 맞아 떠나버린 그 어미처럼

우리 너무 쉽게 숫정을 버릴 때

우리 추억의 문도 소리없이 닫히고

용골 아이 김순동이 오늘도

야밤중에 오줌 싸러 나왔다가

산정 위 일등성 보고

엄마! 하고 부를 때

산이 산으로 우는 소리며

별이 별로 우우우 떠는 소리 더한

지상의 모든 순결한 것들이

제 몫의 외로움을 싸하게 깨닫는 소리

땅 끝 어디 한포기 풀잎에까지

싱싱한 이슬로 미쳐 떨린다

 

                                                                                        <날랜 사랑>, 창작과비평,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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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박성우


끈적끈적한 햇살이

어머니 등에 다닥다닥 붙어

물엿인 듯 땀을 고아내고 있었어요


막둥이인 내가 다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일요일이었던 그날

미륵산에 놀러 가신다며 도시락을 싸셨는데

왠일인지 인문대 앞  덩굴장미 화단에 접혀 있었어요

가시에 찔린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엉덩이 들썩이며 잡풀을 뽑고 있었어요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어머니,

지탱시키려는 듯

호미는 중심을 분주히 옮기고 있었어요

날카로운 호밋날이

코옥콕 내 정수리를 파먹었어요

 

어머니 미륵산에서 하루죙일 뭐허고 놀았습디요

뭐허고 놀긴 이놈아, 수박이랑 깨먹고 오지게 놀았지

 

                                                    <거미>, 창작과비평,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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