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먼 길을 돌아와서 다행이다.

 

   지금 나는 ‘서경식’이라는 사람이 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두 번 읽고 책상에 앉았다. 책 표지의「쑤띤」이 처연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한동안 쉬이 잊혀지지 않을 표정이다. 이틀 동안에 이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집의 책꽂이에 서경식의 다른 책은 없는지 찾게 된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상황이 피상적으로나마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형들의 이야기도 그랬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이야기도 읽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욱 그림을 앞에 둔 글쓴이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요컨대, 글쓴이가 말하려는 내용이 분명하게 다가왔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집의 책꽂이에서 찾은 책은 ‘청춘의 사신’과 '소년의 눈물’이다. 나는 글쓴이가 20세기 미술가들의 작품을 좇아간 ‘청춘의 사신’을 먼저 읽었고, 모국어로 말하고 쓰지 못하는 글쓴이의 안타까움이 인상적이었던 ‘소년의 눈물’을 그 뒤에 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러니까 나는 나온 순서로 따지면 제일 먼저였던 이 책을 맨 끝에 읽게 된 것이다. 다시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니 ‘창비교양문고’ 시리즈로 나왔던 이 책을 언젠가 한 번 손에 집었다 놓았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순간 이 책을 읽은 게 너무 늦은 것인은 아닌가 싶었다. 이 책을 보기도 전에 나는 이미 유럽여행도 다녀왔고(흔히 유럽여행 가기 전에 미술책 한 두권 쯤은 읽는 거 같던데), 그가 자주 중얼거리던 대로 앞으로 당분간은 이 책 속의 그림을 보러갈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야 이 책을 읽은 나는 오히려 늦게 읽어서 더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하다.

   모든 책이 다 그렇겠지만, 그 책과 관련된 배경지식을 알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진다. 그럼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어떤 배경지식이 도움이 될까? 제목이 서양미술 순례니 미술에 대한 지식과 호기심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서경식’이라는 사람의 삶, 특히나 ‘운명이 지워놓은 부당한 무게’라고 할 수 있는 그의 가족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 책을 더 깊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둘째형이었던 서승이 지은 ‘옥중 19년’과 셋째 형이었던 서준식이 쓴 편지글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서경식이 그림을 마주대하고 눌러 쓴 한 문장 한 문장이 깊은 성찰에서 나온 소리로, 호사가의 허투른 말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온전한 자신의 노력이었겠지만, 글쓴이가 영혼에서 진실한 표헌을 길어올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은 어쩌면 부당한 운명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가족사도 한몫을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밝음이 어둠을 만들어냈듯, 어둠과 상처가 밝음과 진실을 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책은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무서운 정념’을 가진 한 인간이었던 그가 그림을 통해 자기 삶의 상처와 가족이 겪고 있는 아픔, 더 나아가 피지배자의 후예로서 지난날의 식민지 지배국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한 인간의 영혼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 책을 만나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멀리 돌아왔으나, 늦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늦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내가 받은 감동이 더욱 컸다고 믿는다.


2. 그림을 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다.


   서양미술 순례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책은 물론 서양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그 글자보다 앞에 ‘나’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미술에 대한 객관적 설명이 아니라,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서 들었던 글쓴이(나)의 느낌이나 감정, 생각을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조금 더 바꾸어 말한다면,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글쓴이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의 생각을 더듬어간다는 것은 내 생각을 만난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짜 맞추기’식이라는 혐의를 각오하고서라도, 그림 앞에선 글쓴이의 마음의 움직임을 몇 갈래의 가닥으로 나누어 본다면, 피지배자의 후예로서 과거의 식민지 지배국에서 소수로 살아가는 자신과 가족의 삶에 대한 정체성, 조국의 감옥 안에 있는 형들을 둔 아우로서 감당해야할 운명의 무게에 대한 성찰, 우리 민족의 감당해야 했던 고단한 삶의 흔적과 세계사에 대한 일반적 통찰, 등을 들 수 있겠다.


가. 자신과 가족의 삶에 대한 정체성

 ․ 나는 다만 운명이 누이의 어깨 위에 지워놓은 부당한 무게를 묵묵히 생각할 뿐이었다.

  (수태고지, 37쪽)

 ․ 허위에 병든 ‘미의식’이 식민지인인 나의 동포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던가를 잊었을 리도 없다.(데셔앙스, 45쪽)

 ․ 유람하러 다니는 외국여행에서 당하는 얼마간의 고생 따위는 어머니가 겪은 회한과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데셔앙스, 51쪽)

 ․ 만인이 다 아는 명화라 할망정 필요 여하에 따라서는 단속이나 말썽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암우한 감성이 그것에서는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니! 그 말은 곧 이 그림에 그려진 살육과 저항 모두가 그곳, 다시 말해서 나의 조국에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은 동시에 위대한 선전물이다. 거의 2세기 전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이 그 작가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극동의 한 나라의 관헌들로 하여금 자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부당하고도 잔혹한 일들을 연상케 하고, 그래서 불안한 기분을 일으키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그림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모래에 묻히는 개, 98쪽)

 ․ 피지배자의 후예가 절대적 소수자로서 지난날의 지배자들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 ‘생활’의 밑바닥이 불안을 품기에 충분하다. 하물며 고국은 두 쪽으로 찢어져 있는 채요, 형들 중의 두 사람은 이미 10년 이상 그 고국의 감옥에 있다. 양친은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화가 누이의 초상, 118쪽)

 ․ ……버둥거리면 버둥거릴수록 속수무책의 불행을 엮어내고 마는, 그러한 삶이 있는 법이다. (화가 누이의 초상, 126쪽)

 ․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위엄이 있었으나 몸차림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고, 피로로 충혈된 눈이 나날의 고뇌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일찍이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와 밑바닥 노동에 시달렸던 나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모습이다.(젊은 부르델의 자화상, 152쪽)


  이처럼 여러 그림 앞에서 글쓴이는 자신과 가족의 처지를 떠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림 앞에서 만난 자신과 가족의 처지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 책의 곳곳에 나온 대로 말한다면, 속수무책의 불행에 엮인 삶이고, 마치 운명이 짐 지운 부당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삶인 것이다. 이들의 불행한 삶의 근원은,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왔다가 눌러앉게 되어 절대적 소수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피지배자의 후예로서의 삶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소년의 눈물’이라는 책으로 묶어낸 자신의 글이 일본의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고 나서 ‘일제가 조선을 식민 지배한 결과 나는 일본 땅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민족 차별 정책 때문에 충분한 ’우리말‘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 같은 역사가 나의 ’빼어난 일본어 표현‘을 가능케 해주었고 끝내 이런 상까지 안겨준 것이라 할진대,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라고 자조하고 있었다. 이를 볼 때, 그는 외부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뼛속까지 자신이 재일(在日)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차별을 감수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그의 조국은 두 형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자행하고 있으며, 늘상 살육과 저항이 빈번해서, 만인이 다 아는 명화를 보고도 자국의 상황으로 오해해서 불안을 느끼는 그런 곳이다. 그런 곳을 그는 ‘조국’이라고 부른다.


나. <테오>와 <서경식>의 경우

  ․  노예는 나의 형인 것이다.(거친 하늘과 밭, 60쪽)

  테오의 죽음은 나를 한층 더 애절하게 만든다.(거친 하늘과 밭, 68쪽)

  ․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인)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이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참고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짐짝인 것이다. 그러므로 ‘슬픔과 고독’은 고흐에게뿐 아니라 테오에게도 있었다. 그것을 처절한 색채감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형의 역할이었고, 그것을 말없이 감수하는 일이 아우의 몫이었다. 테오는 진실로 그러한 방식으로 형 고흐가 행한 창조의 고투(苦鬪)에 당사자로서 참가했던 것다. (거친 하늘과 밭, 69-70쪽)


   만약 나 자신이 ‘고흐’가 그린 그림 앞에 섰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이미 그런 적도 있었으니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떠올려 봐야 할 텐데 도무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아마도 고흐의 그림을 실제로 보고 있다는 것에 마냥 들떠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고흐라는 이름이 주는 중압감에 압도당해 무엇이 그리 좋은지도 모르고 그냥 경탄하고 있었거나!

   서경식은 고흐 형제의 무덤을 둘러볼 때도, 고흐가 그린 그림 앞에서도 ‘정념’에 가득 찬 형을 둔 그 아우, 테오의 삶과 마음을 더듬고 있다. 그 동생, 테오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테니까 말이다. 그에게도 신념을 목숨보다 중요하기 여겼던 집념의 두 형들이 있었으니까. 그 동생 테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당연했다. 마찬가지로 ‘서경식’이 ‘테오’의 죽음에 더 애절함을 느꼈던 것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아마도 서경식과 그의 가족들은 감옥에 가 있는 형제를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이해자가 되어 운명이 휘두르는 채찍의 아픔을 견디지 않았을까?’라고 말하는 것은 테오의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이었던 것이다. 글쓴이는 말없이 아픔을 감수하는 것이 두 형을 감옥에 보낸 동생의 몫이라고 은근히 말하고 있는 듯하다. 테오가 말없이 감수하는 것으로 고흐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처럼 그 자신도 바로 노예처럼 감옥에 묶여있지만 불굴의 의지로 창조가가 되려는, 구도자가 되려는, 아니, 혁명가가 되려는 형들의 삶에 그 자신도 묵묵히 동참했던 것이다.


다. 역사를 꿰뚫는 예리한 눈을 가진 사람

 ․ 프라 안젤리꼬가 그린 화려하고 청순한 종교화의 그늘에도, 처참하기 그지없는 정치와 인간의 드라마가 감춰져 있음에 틀림없으리라고는 확신을 갖게 된다.(수태고지,35쪽)

 ․ 이 저열하고 야비한 정신이야말로 아득히 먼 5백년의 전통이 길러낸 군국 스페인의 정화(精華)인 것이다.

 ․ 군국주의 스페인 5백년의 전통, 그 중후하면서도 저열하기 이를 데 없는 정신에 대하여 한 사람의 그림장이의 거대한 불기의 정신이 대항하고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마침내 승리하는 모습이다. (게르니까, 88쪽)

 ․ 굴욕을 당하고, 수탈을 당하고, 살육을 당해온 우리 민족은 과연 우리들 자신의 「게르니까」를 산출해냈는가. 군국 스페인 5백년의 공포와 중압이 삐까쏘를 낳았다고 할 때, 우리 민족에게 가해지고 있는 고통은 아직 가볍단 말인가.(게르니까, 89쪽)

 ․ 민중의 희생과 저항은 ‘외압’에 대한 승리를 가져왔으나 그것은 반동을 동반하고 온 것이었다. (모래에 묻히는 개, 104쪽)

 ․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가 되지만 대개는 맥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을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두꺼운 구세력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모래에 묻히는 개, 108쪽)

 ․ 평가나 명성이 정해진 것만을 감지덕지 고마워하며 만족해하는, 뒤집어놓은 공식주의 냄새를 맡는다. 그것은 결국 싸움의 승패가 판가름 난 뒤에야 승자 편에 가 붙는 꼴이 아니고 뭔가.(중략) 그것은 변화나 진보를 긍정하는 정신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변화나 진보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변혁하고 극복해야 될 대상으로서의 전통이나 보수를 시대적 조건의 문맥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화가 누이의 초상, 122-123쪽)


   이 책의 곳곳에 언급되어 있는 그의 역사에 대한 통찰력은 예리하다 못해 섬뜩하다. 청순함 뒤에 감추어진 처참함을 꿰뚫는 그의 인식으로, 다른 나라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스페인의 경우처럼 5백년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진주 같은 ‘게르니까’를 아직 만들지 못한 우리 민족의 ‘비극성’에 대한 한탄은 마음을 울린다. 정말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보태야 '게르니까' 같은 전쟁과 반동을 거부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싶다.

  ‘진보와 반동은 손잡고’ 온다는, 그래서 역사는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는 그의 인식은, 빠르게 보수화 되어가는 최근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진보의 시기를 거치고 나면 오히려 진보가 시작되던 그 지점보다 더욱 후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불안이 엄습하는 요즘의 우리 모습이다.

  하지만, 진보가 비록 반동이 함께 올지라도, 그런 희생 없이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당위로서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진보에 대한 희망의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아 마음을 다잡게 된다.


3.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읽은 것일까?

 

   미술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내가 읽은 내용을 끼적거리는 이 글의 어느 부분도 온전히 미술과 관련된 내용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글쓴이가 그림을 앞에 두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퍼 올렸다면, 나는 그의 책을 읽고 내 마음대로 그의 마음을 읽어간 것이라고 되먹지 않은 추측을 해 본다. 만만치 않았던 역사적 무게를 감당해야 했던 한 재일 조선인이 서양미술이라는 도구를 훌륭하게 써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잘 다듬어낸 이 책이 내 마음을 울렸다.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책과 인물,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더구나 내가 읽었던, 서경식 씨의 앞에 두 책(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유려한 문체도 조금은 맛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그의 다음 미술 순례가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