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우리 반은……
느티나무
□ 넋두리
좋은 계절입니다. 놀기엔 아까운 날씨지요? 아까운 시간인데도, 저는 요즘 마냥 놀고 있습니다. 요 며칠 동안은 이런 안락함이 좋았습니다. 그러다, 어제 문득 뒤적여 본 잡지에서 저의 딱딱하게 굳어 껍질 같은 생각을 뚫고 들어와 시퍼런 날빛을 번뜩이고 있는, 비수 같은 구절을 읽었습니다. -교사는 자신의 이상을 강고하게 추구하지 않는 그 순간부터 퇴보한다. 아, 무서운 말이지요? 정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향해 전진하지 않으면 뒷걸음질 친다고 하시더군요. 이 글을 읽은 순간 교사로서 저의 꿈과 이상은 무엇이었던지 갑자기 까마득해지더군요. 처음부터 커다란 무엇을 기대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을까요? 지금 떠올려보니 저에게 아직까지 그런 게 남아있는지, 이렇게 마냥 넋두리를 늘어놓게 만드는 이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인지, 벌써부터 현실을 너무 많이 인정하게 된 것은 아닌지, 지금까지 제가 교사로서 해 온 여러 가지 일들이 방향을 잃고 바람에 따라 우쭐대기만 하던 ‘허수아비’ 모양은 아니었던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 2학기의 우리 반
예전부터 방학을 지내고 오면 아이들이 부쩍 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더군요. 2학기에 만나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은 대하기가 한결 편해지고, 이야기도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 1학기에 신상파악을 위해 했던 개인 면담을 2학기에 들어 다시 한 번 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넉넉하게 두고 천천히 해 보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우리 반 학급 ‘날적이’는 요즘 잘 나가고 있습니다. 개인마다 편차는 조금씩 있지만 그래도 진솔한 내용도 제법 실리고, 무엇보다도 ‘날적이’가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2학기 들어서는 야자 쿠폰제와 ‘학부모 동의서’ 제도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습니다. 꼭 야자 쿠폰이 아니더라도 여러 선생님들께서도 이와 비슷하게 긍정적인 보상 제도를 도입해 보신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저도 예전에 지각생을 대상으로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학급 행사에 적극적인 참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꼭 그 쿠폰을 받아가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것 같아서 씁쓸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우리 반 녀석들은 이제 시작 단계라 아직은 조심스럽고 신기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스스로 꼭 필요한 경우에 알아서 잘 쓰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아이들은, 이번 이종격투기 중계해 주는 날 많이 사용하더군요.]
야자 쿠폰과 함께 아울러서 서서히 야간 학습의 갈등 상황에 대한 제 생각의 중심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방과 후에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원할 경우엔 꼭 학교가 아니어도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곳에 가서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온당할 것 같습니다.[이런 당연한 결론이 왜 그렇게 어렵게 내려질까요?] 그래서 우리 카페에 의주샘이 올려놓은 학부모 동의서를 내려 받아 필요한 학생들에게 주었고, 열 서너 명은 정기적으로 집이나, 독서실, 학원에 가서 공부하며, 교실에는 스물다섯 명 내외의 아이들이 앉아서 자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야간자습에 대해 혼란스럽던 제 생각이 조금씩 정리가 되고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합니다.
사실 제가 집에서는 그리 깔끔한 편이 못 됩니다. 그러나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반 교실은 정말 말도 못할 정도로 지저분하고 약간 퀴퀴한 냄새도 납니다. 학교 건물 자체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치더라도, 자기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선생님처럼 먼저 쓰레기를 주우면서 ‘같이 줍자’고 이야기하기엔 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청소를 용역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당위[이것도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할 논란거리기도 합니다.]는 지금 당장은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려서, 저는 아이들에게 청소시간만큼은 함께 청소하자고 강조[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명령, 협박쯤 될까요?]합니다. 일단 깨끗해진 교실이 다시 더러워지는 데는 하루도 안 걸리지만, 얼마 동안이라도 깨끗한 환경을 누릴 수 있다면 청소시간엔 모두가 청소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늘 교실에 있을 생각입니다. [청소 시간에 땡땡이치는 녀석들을 보면 다른 아이들이 힘들게 청소하고 있는 것과 겹쳐져서 정의감에 불탈 때도 가끔 있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이 녀석들은 2005년의 고등학교 1학년을 어떻게 기억할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늘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있으니 쳇바퀴 속에 갇힌 다람쥐를 떠올릴까요? 어쩌다 혹시, 학교에서의 좋은 기억을 떠올린다고 해도 그 기억에 담임인 저는 없을 게 분명합니다. 아이들이 떠올릴 행복한 기억은 대부분 친구들과의 우정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7년차 담임인 제가 욕심을 좀 부려본다면 아이들의 행복한 기억, 어느 한 틈에 나도 끼어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번 중간고사가 끝나는 주 토요일에 아이들이랑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고기 구워 먹자는 녀석들도 좀 있는데, 저도 물론 고기 먹는 걸 좋아합니다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학교 사정도 사정이지만, 토요일에는 빨리 점심을 먹고 등산을 가려고 계획 중이거든요. [몇 년 전에 담임을 할 때는 강제로 데려갔던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각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하되, 함께 가는 학생들과는 확실하게 친해지려고 노력할까 합니다.[아이들과 가장 친해지는 방법은 쿠폰일까요?] 시험이 끝난 주말이니, 아이들은 근처의 어느 피시방과 노래방을 전전하거나, 친구들끼리 어울려 근처의 배회하겠지요?[제 시각이 아이들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가요?] 그 날 하루만이라도 저와 함께 산에 오를 수 있는 녀석들이 우리 반에 좀 있었으면 합니다. 그냥, 그 날 산에 오른 게 아이들의 즐거운 기억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예전에 밧줄을 타고 내려온 금정산 파리봉 근처로 가려고 합니다.]
․ 그리고 남은 문제들
- 아이들의 성적표, 어떻게 전해주어야 할까요?
- 담임이 물렁하다는 주변의 시선에 상처받지 않는 방법, 아세요?
- 청소시간에 빠지고도 미안한 기색이 없는 녀석들, 어쩌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