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청산에서 책임자 처벌은 양보해도, 배상과 보상은 포기해도, 위령사업은 축소하더라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진상 규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상 규명 없이 명예 회복이나 배상, 보상에만 매달린 경우가 많았다. 진상 규명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사회와 개인, 개인과 개인, 그리고 국가와 사회, 국가와 개인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진상 규명의 과정을 통해 국가와 그 대리인들이 범한 범죄와 그 범죄를 저지르게 된 상황이 공개되고, 또 피해의 사실들과 피해자들의 고통이 알려지면 우리는 사회 내에서 타인이 겪은 고통에 대한 공감과 그러한 고통을 가져온 배경과 상황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이 가졌던 공포와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084쪽쪽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규명하여 역사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 부분은 친일파들이 살아남기 위해 해방 뒤에 어떤 짓을 했는지이다. 일본군 중위나 동네 면장을 지낸 특정한 개인이 일제 강점기에 무슨 짓을 했나보다도, 반민특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와해됐고, 백범 김구가 어떤 세력에게 암살됐고, 이렇게 살아남은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장악하여 민간인 학살과 군사독재 시기의 인권 침해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밝혀내는 일, 이것이 포괄적 과거 청산이다. -086쪽쪽
일본은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했다. 국가를 위해 죽는다는 일은 이제 가까운 장래에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일본보다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한 한국도 피해 갈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죽은 이의 죽음을 비극으로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가치로 현창하는 일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의 공통된 수법이다. '사의 찬미'는 윤심덕으로 족하다. -110쪽쪽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바로 처리되지 못한 데에는 미국의 책임도 크다. 여러 가지 악독한 인체실험을 한 일본군 731부대 문제를 미국이 덮어버린 것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미국이 덮어버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지금 보면 엄청난 전쟁범죄, 반인륜 범죄이지만 당시 미국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군의 심리전 당국이 일본군 패전 지역에서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들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이 문제는 일본 전범을 단죄한 도쿄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100% 덮어진 것은 또 아니다.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네덜란드 출신 등 백인 여성들을 강제로 '위안부'로 삼은 일본군들은 전후에 전범으로 처벌됐다. 미국 등 연합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엄청난 전쟁범죄임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 입장에서 볼 때 백인 피해자의 인권과 조선인 등 아시아인 피해자의 인권이 같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116쪽쪽
이때까지는 그래도 간첨을 갖고 웃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간첩은 주로 북에서 내려온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동백림 사건이 터지고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일동포 형제 간첩단 사건이 터지면서 얘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간첩이 우리의 일상을 옥죄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간첩 그 자체가 아니라, 간첩 잡는 사람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간첩을 만드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2기가 시작된 것이다. -206쪽쪽
요즈음 박정희의 친일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많다. 박정희가 범한 친일행각이며, 좌익 활동과 전향이며, 군사반란이며,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죄가 밉지 사람이 밉나 하며 좀 너그러운 척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일본놈 밑이지만 출세하고 싶고, 남로당이 정권 잡을 것 같고, 반란 음모로 걸렸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지도 팔 수 있고, 정권 잡고 싶으니 군대 동원할 수도 있고... 다 나븐 짓이긴 해도 유독 박정희만 이런 짓을 한 건 아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멸시와 차별 속에 살다가 민족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국에 온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장학금을 주며 따뜻한 격려는 못할망정 거꾸로 매달아 간첩으로 만든 소행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자꾸 <넘버3>에 나오는 조폭보다 더 조폭 같은 마동팔 검사 편에 서게 된다. 죄가 무슨 죄가 있냐구, 죄지은 놈이 정말 나쁜 놈이지...-216쪽쪽
사병 상호간의 가혹행위도 사병이 사병을 통제하지 않을 수 없는 현행 병력 제도, 과도하게 많은 병력이 별다른 권리를 갖지 못한 채 불만에 찬 상태에서 24시간 영내 생활-에서 기인한다. 사병 상화간의 가혹행위는 간부 내의 가혹행위- 간부와 사병간의 가혹 행위의 파장이 사병 내부로 미쳐서 발생하는 것이다. 사병 상호간의 가혹행위 또는 고참의 행포란 군대의 위계 내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전가이다. 이렇게 폭력이 전가되는 구조를 그대로 두고 인성 교육을 통해 가혹행위를 막아 보겠다는 시도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중략) 인성 교육도 안 하는 것보다야 백 번 낫겠지만 화가 나게 되는 근본 원인을 그대로 둔 채 그리고, 폭력의 전가와 화풀이를 강요하는 제도를 그대로 둔 채, 인성 교육만 한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을까?-284쪽쪽
인분 사건과 관련해 떠오르는 두 가지 문제는 단체 기합과 명령 불복종의 문제이다. 먼저 군대와 학교에서 널리 행해지는 단체 기합은 사라져야 한다. 나의 행동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처벌받아야 하는 단체 기합은 대표적인 연좌제이고, 따라서 헌법 위반이다. -287쪽쪽
문민정부가 들어선 것이 1993년이다. 그동안 한국군에 대한 문민통제는 얼마나 진전되었을까? 우리 사회는 단순히 군의 정치적 개입이 차단된 것에 만족할 뿐, 군대는 여전히 성역으로 남아 있다. 군사정권 하에서 군인들의 처우와 복지에 대한 수십 개의 법령이 만들어졌지만, 일반 사병들의 권리에 대한 규정은 눈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 없다. 군인도 사람이냐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군인의 인권에 대해 논하는 것은 사치일까? 도대체 군인에게 어떤 기본권이 주어져야 하고 어떤 기본권이 법률에 따라 제약될 수 있는지를 가늠할 군인인권법의 제정이 시급하다. 군대가 변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인권의 신장은 기대할 수 없다. 내 인격이 무시당한 경험, 남의 인격을 무시한 경험, 그 상처를 안고 매년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제복을 벗고 사회로 나온다. 인권 감수성의 하향 평준화가 군대에서 사회로 이어지고 있다. -290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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