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구판절판


나의 간지럽고 아픈 부분을 이렇게나 간결하게 짚어준 사람이 내 인생에 또 있었으랴. 공부 못하는 죄를 추궁당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못하는 서러움을 이해 받는 것은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물러터진 내 마음은 완전히 물에 만 휴지처럼 흐물흐물해져서, 예쁘고 멋진 데다 현명하기까지 한 박 선생님 앞에서 때아닌 눈물까지 한 방울 선을 보일 뻔했다.-058쪽쪽

선생님이 물으시는 대로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면서 나는 뜻밖에도 후련한 감정을 느꼈다. 나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물오본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다들 착하고 똑똑한 영주, 미련 맞고 덜렁대는 동구라고만 생각했다. 커튼을 젖히고 무대 뒤편으로 가보면 그곳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영주, 생각 깊고 마음 넓은 동구가 있었다. 선생님이 지금 처음으로, 어두운 무대 뒤편에 쪼그리고 있는 착하고 멋진 나를 무대 위로 불러내려는 순간이었다.-097쪽쪽

하지만 앞으로 우리 나라 민주화의 여정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권력은 정부나 여당이 아니라 군부라구. 이 나라의 18년 군부독재가 박정희 일개인의 똥배짱 하나로 유지되었겠어? 그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은 독재의 질서에 익숙해졌어. 박정희가 죽고 나서 부모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봐. 그들은 민주주의를 원치 않고 있어. 누구든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는 독재자에게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의탁하고 싶어한단 말이야. 이런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맞닥뜨리게 되면 무능하다느니, 권위가 없다느니, 산만하다느니 하면 불평을 늘어놓게 되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구? 그들도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저항할 수 없을 거라구? 아니야, 독재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은 또 다른 독재가 자라날 수 있는 가장 비옥한 밑거름이야. 이렇게 기름진 밭이 있는데 독재라는 질길 덩굴이 왜 성장을 멈추겠어?-216쪽쪽

어른들은 어른들의 방식으로 살아간단다. 네 힘으로 당장 고칠 수는 없어. 중요한 건 네게 나중에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잘 하는 거야.-298쪽쪽

할머니처럼 세상을 단순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나는 마음 한편으로 할머니가 부러워졌다. 하지만 세상을 편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한편 그 사람에 맞춰서 좀더 불편하게 살아야 하는 다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306쪽쪽

우리 나라의 모든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누비는 강건한 트럭 운전사가 될 것이다. 트럭 운전사가 되어 첫 월급을 탄다면 제일 먼저 선생님의 향수를 사야겠다. 선생님이 남겨주신 손수건에, 내 뇌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그 향기를 더해서 아주 오랫동안이라도 선생님을 기다릴 언제나 신선한 힘을 얻을 것이다. 선생님과 나는 어느 모퉁이, 어느 골목길에서 마주치게 될까. 세상의 어느 알지 못할 모퉁이에서 선생님을 만날 때, 선생님이 눈빛만으로도 나를 알아보고 두 팔을 벌리실 그 순간을 생각하기만 해도 나는 가슴이 뛰었다.-313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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