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애삼존불을 찾아 오른 태안읍의 백화산에서 다시 한 번 감동받았다.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은 동네 뒷산 같은 산이었는데, 그 산이 품고 있는 폭은 무한이리만치 넓고 아득했다. 백화산의 정상은 지금 군부대와 동거를 하며 몸살을 앓고 있었지만, 산에 오른 우리들에게 자신이 품고 있던 비경, 모두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어제 내린 비 덕에 더욱 또렷했다. 티 없이 맑은 풍경 앞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어쨌든 여유가 있었던 일정이라 오늘은 느긋하게 잠을 깼다. 셋 중에서 내가 제일 늦게 일어난다. 강OO 선생님 덕분에 푸짐한 아침을 먹게 되었다. 갓 구운 빵과 우유, 그리고 얼굴만큼 커다란 복숭아까지. 숙소까지 아침을 사 들고 들어와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며 오늘 일정을 의논해 본 결과, 오전에는 읍내에 가까이 있다는 태안마애삼존불을 보고, 오후에 도보를 시작해서 서산까지 가기로 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내일 마지막 일정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10시면 이제 나서야 할 시간이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읍내 숙소에서 바로 보이는 가까운 곳에 백화산 중턱에 있다고 했다. 산아래에 있는 태안초등학교 뒷문으로 올라가면 그리 멀지 않다고 해서 그곳으로 갔다. 어차피 돌아올 길이라면 짐을 맡기고 다녀오자 싶어서 읍사무소에 들렀다. 친절한 직원 덕분에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동네 뒷산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산 아래 마을의 맨 끝집을 지나자 간이 체육공원이 나왔다. 야트막한 산은 온통 바위투성이, 골산(骨山)이다. 도로를 걸어가는 것과는 다른 느낌, 다른 기분이다. 조금 헉허거리며 산을 오르니 어느새 산 중턱. 산은 생각보다 빨리, 품고 있는 풍경을 우리에게 내어주었다. 바로 암자가 나오고, 가까운 곳에 마애삼존불이 있었다.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원(始原)인 태안마애불. 모든 것들의 처음이 대부분 그러하듯 소박하고 엉성한 모습으로 멀리 동쪽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천 오백년을 서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한창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서 이 마애불을 두고 다양한 이론(異論)들이 많다고 했다. 서산의 마애불은 후덕하고 온화한 인품이 풍기는 인상이지만, 이 곳의 마애불의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서 있는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했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렇게 마애불이 새기면서까지 간절히 기원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해설사께서 태안반도의 물살이 세서 당시 백제와 중국을 오가는 배가 자주 이 곳에서 난파되었는데, 이 마애불을 통해 이 배들의 무사와 안녕을 기원하려던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럴 듯한 설명이었다. 그러면 이 마애불들이 바다 쪽을 향해 있어야 더 적당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 마애불도 여느 불상처럼 동쪽을 향해 싱긋 웃고 있을 뿐이다.

   마애불에 대한 설명을 꽤 오래 들었다.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이렇게 좋은 말씀을 얻어가기만 하는 것이 좀 무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읍사무소에 두고 온 가방과 그 속에 있을 내 지갑 생각이 간절했다. 진심으로 잘 들었다는 인사를 드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잘 들어 줄' 사람이 있어 존재의 의의를 느끼신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돌아왔다. 한참이나 높은 경지!

   백화산 정상은 거기서 다시 100m 정도 올라가야 나온다. 너른 땅, 군데군데 박혔어야 할 돌들이 백화산에만 모여든 듯, 온 사방은 막힌 것 없이 시원하다. 동쪽으로는 서산과 당진이, 서쪽은 바다가, 남쪽으로는 아름다운 천수만과 안면도, 그리고 북쪽은 다시 바다가 모두 보였다. 우리의 눈을, 기억을 믿지 못하는지, 혹은 누군가에게 이 광경을 말하려는지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내려오는 길도 금방이었다. 읍사무소에 들러 '관폐'를 좀 더 끼치기로 했다. 할랑한 읍사무소 한켠에서 자장면을 시켜먹기로 하고 허럭을 받았다. 나는 자장면이 오는 동안, 좀 지쳐서 의자에 멍하게 앉아 있었는데, 강OO 선생님과 김OO 선생님은 아까부터 컴퓨터에 앉아 있는, 여자 아이랑 대화를 나누었다. 그 사이에 점심이 왔고, 어제 저녁에 집에서 쫓겨나 지금껏 굶었다는 이 아이와 함께 자장면을 나눠 먹으며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집으로 가야한다고 달래기도 했다.

   서산으로 가기 위해 읍사무소를 나선 시간이 1시 40분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지체되다 보다 18km의 거리도 꽤 부담스러웠다. 빡빡하게 걸어도 4시간 30분 정도는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거리니까. 슬금슬금 빗방울을 뿌릴 것 같다. 태안 읍내를 한 바퀴 빙 둘러 서산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특별히 서산가는 길이 편했는데, 새로 난 4차선 국도 옆으로 한적한 옛날 도로가 그대로 살아 있어서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쭉 걸었다. 복숭아를, 특히 좋아하는 강OO 선생님 덕분에 도로에서 먹음직스럽게 생긴 복숭아도 사 먹고, 흥얼흥얼 콧노래도 부르면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리가 서산 외곽 지역을 걸을 때 쯤, 길 왼편으로 거짓말처럼 무지개가 선명하게 떠 올랐다. 야, 무지개다. 가벼운 탄성! 무지개는 이제 우리의 시선을 붙잡고, 우리를 흥분시셨던 것 같다. 우리가 길을 떠난 게 이 무지개를 보기 위해서 였을까? 저 무지개는 우리 눈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절대로 우리가 닿을 수는 없다. 허상! 허상, 그래서 더욱 사람의 마음을 끄는 지도 모르겠다.

   여행의 마지막 날 밤. 근사한 숙소를 잡았고, 여느 때처럼 똑같은 저녁 일과가 시작되었다. 차례로 씻고, 저녁을 먹고, 피시방에서 오늘의 일과를 정리했다. 다만, 하나 더 늘어난 일이 있다면, 간단한 자축 파티였다. 캔맥주, 닭 한 마리, 과자 한 봉지가 전부인 소박한 파티였으나 정겨웠다. 오늘 있었던 여러 가지 사소한 일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고, 내일 일정도 의논했다. 이렇게 사소한 일상이 모여서 내 삶이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다시 한 번, 빛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생각해 본다.

   이번 여행이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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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08-2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고 힘들지만 멋진 길을 걷고 계시네요. 마치 우리나라 통일이 가야하는 그 길처럼 말입니다. 걷는 일. 가장 쉽고,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지만, 쉽게 하지 못하는 그 일을 보는 눈은 부럽기만 합니다. 끝까지 건강하시고 힘내세요. 화이팅!!!

해콩 2005-08-23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소한, 그러나.. 빛나는 일상의 소중함.... 그리고 나의 삶! 욕심 없이 한 발 한 발, 그렇게 하루 하루..

느티나무 2005-08-25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여행하는 동안 피곤하기도 했지만 오감이 즐거웠던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이 4번째인데요, 약간 중독성이 있는 것 같더라구요. 계속 이렇게 걸으며 여행할 수 있을까요?

느티나무 2005-08-25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맞아요. ^^ 빛나는 일상. 큰 무엇의 변화도 소중하지만, 교실에서 관계 맺기의 변화가 가장 실질적이고, 혁명적인 변화의 시작이자 완성이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그런 점에서 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해콩 2005-08-26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관계 맺기' 이거 제가 제일 못하는 것 중 하난데..
아직도 작년 담임했던 아이들 생각하며 원망하고 상처가 덜 아물어서 힘들어하고...
그러잖아요.. 한심스럽게...
근데 오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금정산에 물뜨러 갔다가 내려오는 길, '나에게 넌, 너에게 난' (맞나?) 이 노래 들으면서.. 작년 아이들이 떠오르데요.. '오리 날다' 들어도 그런데.. ^^ 추억할 만한 노래, 나에게 남겨준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요. 아이들도 저 노래 들으며 작년, 우리반 한 번쯤 생각해주고 웃을 수 있다면 족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내가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자만은 내려놓을래요. 그건 아이들이 스스로 해야 의미 있는 것이겠지요.
'빛나고 행복한 일상'으로의 복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말해놓고도 다시 힘든 일 닥치면 늘 툴툴대고 궁시렁거리고 힘들어 하는 것이 제 특기입니다. 이젠 파악이 다 되셨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