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자야했다. 오늘부터 전국적으로 쏟아질 것이라는 비 소식을 전하는 일기예보 탓이었다. 그래도 우리 일행은 세 명이고, 비가 와서 떠내려가지 않는 한 가려고 했던 곳을 갈 것이니까, 가벼운 의심-정말 비가 많이 올까- 정도였을 뿐이다.

   안면읍에서 태안반도의 중심, 태안군청까지의 거리는 30km다. 이 정도면 꽤 먼 거린데, 비까지 내린다면 걸음은 더뎌질 것이니 조금 일찍 서둘러야 했다. 여러 개의 전화기 알람에도 꿋꿋하게 누워있다가 8시에 일어났다. 동행들은 이미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야 했다. 아침은 꼭 밥을 먹어야 하는 강OO 선생님의 의견을 좇아 떡으로 먹었다. 나는 떡을 좋아하니까 아주 맛있게 먹었다.

   큰 비가 온다고 말했던 텔레비전이 이번엔 틀렸는가 보다. 새벽에 비가 온 흔적만 있고, 날은 잔뜩 흐려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금방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오늘만 참아주지'를 반복하며 안면읍내를 걸어나왔다. 비가 내리지 않고, 날이 흐리니 더없이 상쾌해서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더구나 안면도는 길 양 옆은 모두 청신한 소나무 숲이 자리잡고 있어서 넓은 송림숲을 걸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어제 다 못한 이야기들이 술술 새어나와 심심하지도 않았다. 나는 발가락에 잡힌 물집이 약간 따끔거리기 시작해서 걷는 것이 약간 불편할 뿐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지나가다 안면도의 관광안내도를 보고는 안면암의 부교(浮橋)가 눈에 들어와 거기를 가 보기로 했다. 안면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해안으로 꽤 먼 거리여서 입구에서 차를 얻어타기로 했다. 생각보다 먼 거리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가 10분만 기다려보고 차를 얻어타지 못하면 태안군으로 바로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3분도 지나지 않아서 차 한 대를 쉽게 얻어타고 울퉁불퉁 흙길을 달려 안면암에 도착했다. 안면암 2층에서 내려다본 모습.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둘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드넓은 갯벌이 천수만 바다를 밀어내고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바다는 다시 그 갯벌의 아득함 뒤로 아스라했다. 동행들은 암자에서 부교를 건너 눈 앞의 섬까지 다녀왔지만, 나는 천수만이 한 눈에 내려다 뵈는 안면암의 2층 난간이 더 좋았다.

   워낙 외진 곳이라 쉽게 나갈 수 없겠다는 예상과는 달리 언제나 운이 좋은 우리는, 금방 나가는 차를 얻어탈 수 있었다. 처음 차를 탔던 곳까지 돌아와 다시 도보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우리는 안면섬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안면섬과 육지는 채 100m도 안 되는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어도, 섬은 섬인지라 빠져나오자마자 도로 주변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진 것 같았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으나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어디 괜찮은 식당이 없는지를 계속 두리번거리는 우리에게 '레미콘노동자 파업 63일째'라는 천막 농성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피맺힌 심정을 대변하는 듯 시커멓거나, 빨간 색으로 아무렇게나 쓴 듯한 글이 천막 곳곳에 적혀 있었다. 길 건너편에선 우리는 강OO 선생님의 주도로 '투쟁기금'을 모으기로 했다. 음료수라도 사들고 들어갔으면 했지만, 가게 한 군데 없는 길 옆이라 봉투도 없이, 3만원만 달랑 들고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그 분들은 그 분들대로 우리가 주저하는 게 '라면이라도 좀 끓여달라는 부탁'을 우리가 부끄러워서 망설이는 것으로 보셨나 보다. 손짓을 하며 건너오라고 하신다.

   길을 건너서 투쟁기금을 슬그머니 놓고 돌아서는데,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계속 점심이라도 들고 가라시는 걸, '괜찮다'고 하자 우리들에게 음료수를 쥐어주셨다. 나는, 저럴 때 얼마나 힘이 나는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이런 작은 응원이 자신의 권리를 찾아나선 노동자들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내가 편향된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 그렇겠지만, 여전히 우리 나라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을 볼 때마다 마음이 먹먹하고 짠하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의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기 않기를...

    발걸음은 이제 훨씬 가볍다. 나도 가뿐한 마음으로 남면사무소가 있는 곳까지 쉬지 않고 걸을 수 있었고, 비록 3시 30분이었지만, 행복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는 맞은 편 우체국에서 쉬기로 했다. 친절한 우체국 직원 덕분에 푹 쉴 수 있는데다가 공짜로 커피까지 마실 수 있었다. 인터넷은 기본! 그러나 가야할 길이 많은 탓에 서둘러 길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그 때까지 참았던 하늘이 드디어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오래 참아서였을까, 빗방울이 500원짜리 동전만큼 굵은 것이었다. 미처 어디로 피할 틈도 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에 완전히 젖어버렸다. 가방이야 아침부터 미리 꽁꽁 싸둬서 짐은 안 젖겠지만, 겨우 버스정류장에 피해 쉬고 있는 우리의 몸이 물에 빠진 꼴이다. 폭우를 맞는 것도 신기한 경험인지라 연신 사진기로 기록을 남겼다.

   굵은 방울이 가는 방울로 바뀌었고, 가는 방울도 점차 뜸해지더니 비가 그쳤다. 세상은 금방 세수를 끝낸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다. 비 온 후의 맑은 풍경을 보며 걷는 맛이 일품이었다. 하늘은 어느덧 가을의 표정을 짓고 있다. 초록의 바다 가운데 드문드문 붉은 색 점이 찍힌 고추밭은 잘 자랐고, 고추밭 너머로 훌쩍 자란 수숫대, 그 너머엔 방금 씻은 가을 하늘이 손에 잡힐 듯 맑고 파랬다. 이런 풍경과 함께 걷는 길은, 마치 오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행복한 저녁길이었다.

   오늘도 역시, 운 좋게도 값이 싸면서도 시설도 꽤 괜찮은 숙소를 구했다. 비에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꾀죄죄한 옷차림 덕분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얼른 씻고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항상 피시방에 들러서 오늘 일과를 기록해 둔다. (매일 하지 않으면 이번 여행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못할 것 같기 때문에, 힘들고 피곤해도 꼭 기록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더욱 첫날의 여행기가 날아간 게 속상하다.)

   방으로 오는데, 가을 바람 같이 서늘한 바람이 분다. 곧 가을이 오려나 보다. 숙소에서 내일 일정을 의논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다. 내일 일은 내일 하잔다. 그러지, 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콩 2005-08-23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가을 바람처럼 살랑살랑 행복한 글이네요.. 그 날의 모습들이 눈에 선~해요.. ^^
참!! 사진은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