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바람이 진짜 시원하네요.”

  “거봐라, 올라오니까 좋잖아?”

  “그래도 오는데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다 큰 녀석들이 엄살 부리기는……”

  “빨리 기념사진 찍어요. 높이 올라오니까 부산 시내가 다 보이긴 하네요.”

  “알았다, 다 같이 사진 한 번 찍자. 여기 이 사진에 나온 사람은 내가 아이스크림 쏜다.”

 

   백양산 불웅령에서 애들과 이런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내 눈은 연신 저쪽에 있는 안부를 향한다. 산자락 입구에서부터 뒤처져서 느릿느릿 걷던 대여섯이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아이스크림을 사 준다고 말한 것도 다분히 이 대여섯을 겨냥한 말이기도 했다. 사진을 찍고도 한참이나 정상에 선 감격을 나누었는데도 여전히 그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다. 다음 수업 시간에 맞춰가려면 이제는 슬슬 내려가야 할 때다. 괘씸한 마음을 감추고 올라온 녀석들과 함께 하산을 하려는데 저 멀리서 녀석들이 나타났다. 여섯 명! 느긋한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안 올라오리라고 지레 짐작했던 내 속이 뜨끔했다. -- 아, 이렇게 선입견을 가지고 애들을 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먼저 온 녀석들은 내려 보내고 뒤늦게 온 녀석들을 맞아서 또 사진을 찍고 경치를 보고 너스레도 떨었다. 다른 등산객은 물론 나에게도 살갑게 구는 녀석들이 오늘은 참 예뻐 보였다. 넉살 좋은 이 녀석들은 다른 등산객들에게 인사도 잘 하고 말을 건네는데도 스스럼이 없다. 교실에서 볼 때와는 참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공부시간에는 늘 기운 없이 축 쳐져 있었던 녀석들이 힘들게 올라온 이곳에서 생기가 넘쳤다. 나에게도 교실에서와 달리 무척 살갑게 군다. 녀석들이 보는 나도 교실에서와는 많이 다른 것일까? 언제부턴가 녀석들이 산에 가자고 자꾸 조르는데, 어쩌면 내 표정도 교실 안과는 무척 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문계고등학교 3학년의 동아리활동 시간은 죽은 시간이다. 교육과정에 있으니까 동아리 편성은 해 두지만 암묵적으로 자습을 하는 게 관행이다. 고 3담임을 몇 번 맡았던 나도 지금껏 쭉 그래 왔다. 올해도 별다른 고민이 없었다. 원래 그런 거라고,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올해 동아리 반 이름을 정할 때 멈칫했다. 고심(?) 끝에 지은 이름이 등산반. 그리고 우리 반 애들을 모두 같은 동아리에 배정해 두었다.

   첫 번째 동아리 시간에 애들한테 슬쩍 물었다.

   “우린 등산반인데 산에 갈래?”

   합창으로 들려온 대답

   “아니오.”

   “알았다. 그럼 자습해라”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동아리 시간이 되었다.

   “동아리 시간인데, 오늘은 산책 갈까? 저번에 자습하니까 지겹지 않더나?”

   “…… 산책이요? 어디로요?”

   “저기 뒷산에나 잠시 갔다 오지 뭐”

   “샘, 등산가는 거 아니죠?”

   “아니라니까, 우린 그냥 산책로를 따라 산책 가는 거라니까”

   “진짜지요? 그럼 나가지요.”

 

   이렇게 처음 시작된 동아리 반 산책(?)이 벌써 대여섯 번. 이젠 수요일쯤부터 등산가는지 묻는 녀석들도 있고, 자연스럽게 등산복을 챙겨오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수업 들어오시는 선생님들께도 우리 반은 동아리 활동으로 등산가는 반, 이라고 자랑도 한다. 금요일 5교시 예비 종이 울리면 중앙현관 앞에 옹기종기 모이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 모든 풍경이 참 고맙다. 이젠 내가 앞장서지 않고 먼저 나선 애들 뒤를 따라 산에 오를 일만 남았다. 부디 우리 모두 오래도록 지치지 않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