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V

 

의자를 들게 하고 그를 세워 놓고 한  시간

또 한 시간 뒤에 교실로 올라갔더니

여전히 그는 의자를 들고 서 있고

선생인 나는 머쓱하여 내려왔지만

 

우리들의 왜소함이란 이런 데서도 나타났다

그를 두고 하선생과 주먹질까지 하고

나는 학교에 처벌을 상신하고

 

누가 누구를 벌 줄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우리들이 더 미워해야 할 잘못과

스스로 뉘우침 없는 내 자신과

커다란 잘못에는 숫제 눈을 감으면서

처벌받지 않아도 될 작은 잘못에만

무섭도록 단호해지는 우리들

 

떠나온 뒤 몇년 만에 광화문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뵈는 그의 손을 얼결에 맞잡으면서

오히려 당황해져서 나는

황급히 돌아서 버렸지만

 

아직도 어떤 게 가르침인지 모르면서

이제 더 가르칠 자격도 없으면서 나는 여전히 선생이고

몰라서 그 이후론 더욱 막막해지는 시간들

 

선생님, 그가 부르던 이 말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선생님, 이 말이 동두천 보산리

우리들이 함께 침을 뱉고 돌아섰던

그 개울을 번져 흐르던 더러운 물빛보다 더욱

부끄러웠다.

그를 만난 뒤 나는 그것을 다시 깨닫고

 

- 김명인,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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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5-06-24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는 절판인 김명인의 '동두천'을 오늘, 동네 서점의 시집코너 한 귀퉁이에서 찾았다. 동네 서점을 뒤지다 보니 낡은 시집을 네 권이나 손에 들게 되었다. 모두 다 아주 옛날 시집인데 낡은 냄새가 폴폴 날리는 게 참 정겹고 좋다. 내일 서울 갈 때 손에 넣고 갈까나? ㅋㅋ

해콩 2005-06-2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낡은 시집 찾기 하는 게 취미인데... 그 책은.. 암만 찾아도 없드마는... 책, 역시 인연이라는 게 있나봐요. 샘, 혹시 두 권 가지고 계시면.. 저한테 한 권 넘기심이.. ^^ (아, 나이 들수록 늘어가는 친밀함의 탈을 쓴 이 뻔뻔함이여~ ^^;)

느티나무 2005-06-26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의 말씀 잘 기억했다가 다음에 그 책 보면 제가 다시 사겠습니다. ㅎㅎ 그 때 선물로 드리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