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저의 기쁨이요, 희망이요, 자랑입니다."

   올해 아이들에게 들려줄 내 다짐이다. 며칠 전부터 계속 입 속에서 중얼거리면서 학교에 오고 있는데, 요즘 우리반 녀석들을 보면 이 말이 쑥 들어가 버린다.

   한마디로 속상한 일이 많다. 내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이번 주에 있었던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이렇다.

   월요일에 스승의 날에 찍은 사진을 나눠줬다. 다른 친구들도 서로 사진 구경하라는 뜻으로 사진을 자기 사물함에 붙여 두라고 월요일에 말했다. 화요일에는 테이프와 가위를 빌려 주며 사진을 붙이라고 했으나 반응은 시큰둥했다. 수요일 아침까지 붙여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하자고, 다 붙여서 구경하고 나면 그 날 오후에 바로 떼자고 했다.

   수요일 아침 조례 시간. 여전히 사진이 반 정도 밖에 붙지 않았다. 음, 이건 좀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단순히 사진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여러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누구나 자기 상황에 빠지면 한 쪽만을 보게 되는 법이다. 복도로 모두 불러 내어서 왜 붙이지 않았는지 물었다. 물론-내 입장에서지만-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걸로 더 잔소리하기 뭣해서 '팔굽혀펴기' 3번을 하고는 들여 보냈다. 그리고는 들어가는 녀석들의 뒤통수에다 대고 "토요일 아침까지는 붙여 놓아라"고 말했다.

   오늘 아침 조례가 끝난 시간. 아직도 7명이나 사진이 없다. 일일이 왜 붙이지 않았냐고 묻자 그제야 테이프가 없다는 둥, 집에 두고 왔다는 둥의 변명을 한다. 이럴 때면 정말 도를 닦는 심정이다. 다시 복도로 불러내어 벌로 '팔굽혀펴기' 6번을 하고는 들여 보냈다. 그리고, 모두에게 안 붙여둔 친구는 어쩔 수 없고, 오늘까지 서로 보고 다 떼 가서 집에 보관하라고 일렀다.

   4교시에 다른 반에 수업을 들어갔더니, 호기심이 잔뜩 묻은 얼굴로 녀석들이 묻는다.

   "선생님, 오늘 사진 안 붙였다고 때렸어요?"

   "아니, 때린 적 없는데...벌 받았어. 팔굽혀펴기 6번..."

   "어? 그럼 애들이 뻥친 거에요? 애들이 샘 많이 화나서 몽둥이 들었다던데요..."

   "글쎄... 애들이 내 말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화는 났지만 때린 적은 없어"

   이런 말을 들어도 좀 속이 쓰린다. 저희 반 담임이 얼마나 짜증났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다. 수업이 끝나고 종례시간. 아침의 저 다짐은 공허해지고 다시 잔소리는 이어진다. 사진 다 찾아갈 것, 여름방학 보충수업 희망하지 않는 학생은 나한테 와서 말할 것, 급식할 때 자기가 먹은 식판은 꼭 자기가 치울 것, 청소시간에 자기 청소 구역은 책임지고 해 놓을 것... 등등.

   아, 그리고 3000원짜리 학교 매점상품권이 걸린 우리반 인사 공모의 결과를 발표하고 오늘 연습했다. 아이들의 그 황당한 표정이라니...ㅋㅋ 우리반 종례 인사로 확정된 구호는 이렇다.

   "(반장이) 목숨을 걸려면 (모두가) 미래에 걸자 (박수로)짝짝 짝짝짝 짝짝짝짝 짝짝 (모두)내일 뵙겠습니다."

   이렇게 처음이라 어색한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도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반 녀석들이 오늘 옆 반이랑 축구 시합이 있고, 그 반 선생님도 나오신다고 해서 나를 데리러 왔다. 여러가지로 일이 많이 있어서 어쩔까 좀 망설이다가 뛰기로 했다. 땡볕에서 50분이나 뛰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우리반의 압승. 5:1이었다.

   시합이 끝나고 한참이나 교무실에서 쉬었다. 생각해 보니 아침도 안 먹었고, 점심도 안 먹은 상태였다. 배가 고픈 건 이미 지나가 버렸다. 터덜터덜 학교를 나와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동네 서점에서 책을 좀 사고 싶었다.

   알라딘에서는 절판으로 나온 '사람 vs 사람'을 고르고, 누군가를 빌려 줘서 우리집에 없는 '살아간다는 것'을 또 사고, 1987년에 초판이 나온 시집도 한 권 집었다. 기운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수행평가를 채점하려고 잔뜩 가방에 넣어왔으나 아직 손도 대지 못했다. 기운을 차려야 겠다. 월요일엔 다시,

   "여러분은 저의 기쁨이요, 희망이요, 자랑입니다."를 말하게 될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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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5-06-1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숨을 걸려면 미래에 걸자..호오..무섭습니다^^; 그나저나 아이들이 요즘 신나해하고 있는 것은 뭔지 참 궁금하네요.

느티나무 2005-06-19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아이들이 신나 하는 것? - 진부하게 들리시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을 마음을 빼앗은 건 온라인 게임이죠. 우리 반은 요즘 운동에 빠져있어요. 그 쉬는 시간에도 나가서 축구, 농구, 야구, 탁구를 하고 오니까 말이지요.

해콩 2005-06-1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문제는 완벽!하게 다 냈습니다... 어제 오늘 하루 죙일.. 수행평가 채점하려고 들고 왔는데 그/대/로/ 가방에 챙겨 넣은 거 있죠..
아이들이랑 아웅다웅.. 그러면서도 기쁨과 희망과 자랑임을 다짐하는 샘이 참 좋아보여요~ 내일은 꼭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05-06-25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느티나무 2005-07-01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님, 격려와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학교 생활이 만만치는 않지요? 근데 저 같은 경우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어리숙해지는 것인지... 아무튼 님께서 좋은 시절을 보내신다고 생각하십시오,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가슴뛰는 첫마음을 간직한 그 시절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