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보란 듯이

-윤제림


학질이나 그런 몹쓸 병까진 아니더라도
한 열흘 된통 보란 듯이 몸살이나 앓다가
아직은 섬뜩한 바람 속, 허청허청
삼천리호 자전거를 끌고
고산자 김정호처럼 꺼벅꺼벅 걸어서
길 좋은 이화령 두고 문경새재 넘어서
남행 남행하다가

어지간히 다사로운 햇살 만나면
볕 바른 양지쪽 골라 한나절
따뜻한 똥을 누고 싶네, 겨우내 참아온
불똥을 누고 싶네 큼직하게 한 무더기 보란 듯이
보란 듯이 좋은 봄날

<삼천리호 자전거>에서

 

강가에서

-윤제림


처음엔 이렇게 썼다.

다 잊으니까 꽃도 핀다.
다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천천히 흐른다.

틀렸다. 이제 다시 쓴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꽃도 핀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시퍼렇게 흐른다.

<사랑을 놓치다>에서

 

사랑을 놓치다

-윤제림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사랑을 놓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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