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은 7월 20일, 금요일이었다. 오후엔 지금껏 무탈하게 한 학기를 보낸 나 자신을 위해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봤었다. 진짜, 모처럼 영화관에 갔다.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재밌게 봐서 그 며칠 후에는 다크 나이트, 배트맨 비긴즈를 디브이디로 차례차례 봤다. 날 밝으면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 하는 심청이의 마음이 이랬을까?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보충수업을 불안스레 기다리며 주말을 보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전 8시부터 1시까지 보충수업을 했다. 매 시간 수업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오전에 3시간씩 수업을 했다. 비는 시간은 내일 수업 준비를 위한 교재 연구. 1시부터 2시까지는 점심시간. 날이 더워서 학교 식당 가는 길도 힘겨웠으니 어디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또 점심시간이 짧아 믹스 냉커피 한 잔 하기에도 빠듯했다. 2시부터 5시까지는 자율학습. 교실은 그나마 에어컨이라도 나오는데 감독을 위해서 복도를 돌아다니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이런 하루가, 월화수목금토, 월화수목금토, 월화수목금토, 월화까지 이어졌다. 그 마지막 화요일이 8월 14일!

 

   퇴근해서는 몸을 가눌 수가 없을 정도로 피곤이 몰려들었다. 집에선 거의 소파와 일심동체가 되어 잠이 들었다. 피곤하니까 그 폭염에도 잠은 온다. 자고 나면 땀을 한 바가지 쏟아 옷이 축축해 져도 자는 동안은 그것도 모르고 죽은 듯이 잤다. 저녁에 한숨을 자고 나면 그나마 기운이 나서 겨우 저녁을 먹었다.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내일 수업 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뒤적거리기도 하고, 올림픽 기간에는 열없이 중계 방송을 보기도 했다.

 

   밤이 이슥하면 가끔 강변에 있는 구민운동장에 나가기도 했다. 밤 10시가 넘었어도 날은 후텁지근하고 강바람도 없어서 운동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돌아와서 씻으면 자정이 가까운 시간, 그제야 정신이 좀 맑다. 그 때부터 자기 전까지가 책 읽는 시간. 방학 독서 계획으로 세운 책은, <로마제국 쇠망사>였다. 책은 무척 재미있고 잘 읽혔는데, 결국 1권도 다 읽지 못했다. 책 읽는 시간이 무척 짧아서 제국의 역사,를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할 부분과 자꾸 어긋나는 바람에 집중력이 떨어진 탓이다. 

 

   그래서 아예 책을 꺼내지도 않은 날도 많았다. 와, 이렇게 책 한 번 펼치지 않고도 며칠이 가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방학인데 말이다. 그러다가 방학 끝무렵에 읽은 책이, 철학, 삶을 만나다, 라는 책이다. 사 둔 지는 무척 오래된 책이었으나 다른 책에 밀려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 보게 됐다. 퍼뜩, 내 삶에는 철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각 장이 독립된 내용이라 하루에 한 장씩 읽어 볼 수 있다. 이번 방학엔 이렇게 딱 1권의 책을 읽었다. 다 읽고 내린 결론은, 그... 나에겐 철학이 필요해! 였다.

 

   일요일에는 오전엔 늦잠, 오후엔 수영장을 다녀왔다. 지난 겨울에 배운 수영 실력을 어느 정도 유지해서 이번 겨울에 다시 배울 예정이기 떄문에 가끔 수영장을 다녔다. 그 때도 못해서 제일 꼴찌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더욱 엉망이다. 그렇지만 배우는 것을 즐기는 마음으로 한다면, 조급해 하지 않는다면, 포기하지 않는다면, 수영 쯤이야 결국엔 남들이 가 있는 곳에 나도 도착하리라고 믿는다.

 

   보충수업이 모두 끝난 8월 15일, 16일, 17일, 18일, 19일 중에서 16일과 18일은 학교에 출근을 했다. 보충은 끝났지만, 마침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몇 대학의 수시 모집이 시작되었고, 이 시기에 모집하는 대학들은 대부분 자기소개서와 추천서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교정 보느라 방학 이틀을 꼬박 썼다. 17일 하루는 대전에서 내려온 여동생과 조카들과 함께 보냈다. 그래서, 8월 15일과 19일 딱 이틀만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뒹굴거리면서 보냈다.(이 때도 책은 거의 보지 않았던 거 같다.) 

 

   보충을 시작할 때는 손학규 후보의 '저녁이 있는 삶'이 나에게도 펼쳐지겠구나, 하는 기대가 컸다. 학기 중에는 거의 10시 반에나 집에 오는데, 방학 땐 그래도 5시 반에 오니까 뭔가 근사한 저녁이 있는 삶이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그것도 의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한 '환경'과 '시스템'이 우선이다. 그러나 환경과 시스템이 갖추어진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내 경우를 생각해 볼 떄 자기 삶을 가꾸기 위한 주체적인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더 단단해져야 한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30일의 방학이 끝나고 어제 개학을 했다.

 

   뱀발 : 단언하건데, 나는 지금 방학이 짧아서, 못 놀아서, 억울하다거나 기분이 나쁘다고 누군가에게 징징거리는 게 아니다. 누구는-아니, 대부분의 노동자는 이런 방학마저 없다. 그런 사람들에 견주면 저녁에 잠이라도 잘 수 있는 생활을 두고 불평할 까딹이 무엇이겠는가? 그냥 내 인생의 어느 한 때, 방학생활의 풍경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도 세월은 가고, 어느새 흰머리가 드물지 않은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개학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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