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윤수(스포츠/문화평론가)

 - 월간 우리교육(11월호) 재인용, 2004년 10월 1일 오마이뉴스

   추석, 긴 연휴의 틈을 비워, 서점에 갔다. 가서 놀라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놀랐고 대부분 아이들과 함께 동서양의 이야기를 만화로 엮은 책 사이에 몰려 있는 것에 또 놀랐다. 그러나 내가 정작 놀란 것은 신간 소설 코너였다. <청소년을 위한 칼의 노래>,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것은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청소년들이 읽기 쉽도록 새로 고쳐 쓰고 그림과 각주를 단 '청소년본'이었다. 두 책을 구분하기 위하여 '원본'과 '청소년본'으로 구분하여 부르겠다.

   내 기억에 그 소설은 한 권으로 출간된 바 있다. 무슨 까닭으로 그 책은 두 권으로 나눠 팔렸고 최근에 청소년본까지 출간된 것이다. 그 과정의 어떤 유의미를 나는 아직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왜 한 권을 두 권으로 나눠 출간하고 그다지 길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은 소설을 '청소년본'으로 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잠깐, 나는 방금 <칼의 노래>가 '길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고 했는데, 아마 반문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길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꽤나 어려운 소설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 것이다. 물론 그런 점은 있다. 짧게 끊어 치는 인파이터의 문장 사이에는 서늘하면서도 장중한 바람이 잉잉 불어대고 있으니 틀림없이 쉬운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청소년본'을 낼 만큼 어려운가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설령 어떤 소설이 대단히 난해하며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거의 주술에 가까운 귀기를 내뿜는다 해도 그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쓴다'는 것은 소설에 대한 모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손창섭이나 박상륭의 소설이 아무리 난해하다 해서, 그것을 해체/재구성하여 청소년들을 위한 판본을 달리 출간하는 것은 볼펜을 꽉 움켜쥐고 새벽까지 글을 쓰다 지쳐 쓰러진 소설가의 뒷통수에 찬물을 끼얹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선생, 뭘 그리 어렵게 사슈."

   예를 하나 들겠다. 박경리의 <토지>도 청소년본이 따로 있다. 마침 추석도 지냈으니 원본의 첫 페이지를 읽어보자. 
제1편의 제목은 '어둠의 발소리'. 1백 여년 전의 한가위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풍요로운 들판과 흥겨운 가락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첫머리는 음산하고 적막하다. 최참판 댁의 장려한 운명을 예고하는 듯한 심란한 단어들이 곳곳에서 배수진을 치면서 이 소설이 한가롭게 풍경 묘사로 끌려가는 것을 단단히 붙들어매고 있다.

   "이를테면 '최참판 댁 사랑은 무인지경처럼 적막하다. 햇빛은 맑게 뜰을 비쳐주는데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12쪽), 혹은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하듯 맴돌던 찬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을 건드려주기도 한다."(14쪽) 등의 황량한 서정이 <토지>의 서두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토지문학연구회'가 '엮은' '청소년본'(이룸출판사)에서 그 대목들은 과감한 생략에 '힘입어' 문장 사이의 온도가 사뭇 다르게 변하고 만다. "평사리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최 참판댁 뜰에도 햇살이 화사하게 비추었다. 다섯 살배기 계집아이 서희는 뜰 안을 팔랑팔랑 뛰어나뎠다. 혹시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할까봐 조마조마한 봉순이가 서희 뒤를 쫓아다녔다. '넘어지믄 큰일난다 캤는데, 애기씨'"

   이건 전혀 다른 소설이다. 집필기간 26년이요 등장인물이 700여 명에 이르는, 말 그대로 '대하장편'이므로 청소년들이 읽기에 부담이 될 수는 있다. 그래서 원본의 1/6로 과감하게 줄여서 '청소년본'을 냈는지도 모른다. 원본의 압도적인 질감을 어느 정도는 되새기려고 고생은 한 듯하다.

   그러나 부질없는 고생이다. 우선 누군가 이 청소년본을 읽는다면 그는 '원본은 따로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아마 원고지 5000매 가량의 '청소년본'을 사는 순간부터 '언젠가는 21권짜리 원본 세트를 사서 읽어야지'하는 압박을 느낄 것이다. 청소년본만 읽고 만다면 그는 <토지>를 전혀 읽지 않은 셈이며 다만 조금 길게 요약한 줄거리를 읽은 것에 불과하다. 그가 만약 성실한 청소년이라면 지나치게 친절한 출판사 때문에 두 번 고생을 할 것이다.

   자, 이번에는 문제의 책 <청소년을 위한 칼의 노래>를 보자. 원본이 대하장편인가? 그렇지 않다. 원래 한 권으로 출간된 적도 있다. 수백 명의 인물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조선과 일본의 수군들이 수천 명이나 등장하지만 그것은 단지 '수천 명'일 뿐 주목할 만한 인물을 너댓이다. 윌리엄 포크너나 제임스 조이스처럼 끝없이 쉼표로 이어지는 복합문의 나열인가? 그렇지 않다. 제목처럼 칼날같이 끊어치는 단문이 대세다.

   그런데 왜 청소년본을 따로 출간하는가? 그 사색의 우물이 깊고 난해한가? 혹시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문장의 표면에 착색되어 있지는 않다. 이를테면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1권 19쪽)와 같은 문장? 독자들은 저마다의 교양 수준과 인생 경험으로 전율을 느낄 만한 이 단호한 스타카토 문장 사이로 스며드는 것이다. 이제 막 몽정의 짜릿한 황당함을 느꼈을 청소년도 예외는 아니다.

   <칼의 노래> 청소년본은, <토지>가 그러하듯이, 삽화와 자막들이 자주 나온다. 나는 이것이 소설 읽기를 방해하는 저주받을 악이라고 생각한다. 그 많은 삽화와 자막에 의하여 독자들은 문장 사이로 스며들지 못하고 어떤 상황을 '비주얼'로 직역해준 그림에 의존하여 줄거리를 잇기만 할 뿐이다. 문장 속의 깊은 우물로 들어가지 않고 삽화에 문자를 짜맞출 뿐이다. 이는 세상을 쉽게 설명하고 마는 비주얼의 마력에 대항하기 위해 악착같이 결기어린 문자에 매달린 소설가의 각오를 배반하는 악덕이다.

   청소년을 위한 '재집필' 부분도 많지 않다. 예컨대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원본, 17쪽)는 문장을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쳐 들었다.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묶인 사슬을 풀고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는 정도로 바꾸었다. 문장이 두 개로 나누고 '결박'과 '듯싶었다'가 다른 단어로 바뀐 것인데 그 변화가 '청소년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다. '결박된 사슬'과 '묶인 사슬'의 차이는 무엇이며 '듯 싶었다'와 '것 같았다'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원본의 내러티브를 청소년본이 과감하게 해체/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처음에 저자/출판사 측에서 '쓸 데 없는' 줄거리나 '지나치게' 사색적인 문장을 빼거나 고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어 보니 원본의 순서를 대대적으로 바꿔 놓은 것이 많았다. A-B-C-D를 A-D-B-C 식으로 섞어놓은 것이다.

   엄밀히 말해 '청소년본'이 아니라 '개작'에 가까운 것인데 어떻게 부르든 간에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 '청소년본'이라고 하기에는 원본의 스산한 정서가 여전하며 줄거리 또한 축약되거나 '선명'해지기 보다는 원본의 패를 뒤섞은 것에 불과해 보인다. 저자 자신이 '청소년본'임을 밝혀두고 있으니 '개작'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처음 이 소설을 쓸 때 "19세 이상 사용가'를 염두하고 썼는지도 의문이다.

   출판사 측에서 홍보용으로 만든 청소년본의 띠지(책 표지에 씌워진 홍보용 전단)는, 출판사와 소설과 김훈 모두를 모욕하는 단어로 채워져 있는데 "논술과 수능 준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예비 텍스트"이란 말, 그리고 뒷표지에 적힌 "네티즌 선정 노벨 문학상 후보 차세대 우리작가 1위" 등의 수사는 지우개로 박박 지워야 할 만큼 천박하기 짝이 없다.

   물론 김훈은 중요한 작가다. 어떤 일로 문학평론하는 사람과 통화를 할 일이 있었는데, "요즘 김훈 만한 작가가 있습니까"라는 그의 말, 지금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유보적이다. 아직 문학적인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았다. 무슨 문학상을 타고 대통령이 추천하고 많이 팔리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김훈답지 않은 어수선한 풍경이다.

   '수능 텍스트'요 '노벨문학상 1위 후보' 운운은 만년필을 꽉 쥐고 온 몸으로 원고지 칸을 밀어나가며 글을 쓴 김훈의 소도구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김훈은 그를 사랑하고 또한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자들과는 슬며시 비껴서서 어디론가 사라질 때 가장 김훈답다.  

   독자들이여. 난해하면 난해한대로 읽고, 읽히는 대로 읽으면서 결국 몇 년에 걸쳐 읽고 또 읽는 것이 소설 아닌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글자를 읽어 줄거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사이로 독자가 산책하는 것이며 작가와 독자가 그 울창한 문장의 숲 속에서 끊임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 과정 아닌가. 

   '청소년을 위한...'이라니,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세상의 속됨이여, 이젠 '견고한 고독'에 사무쳐야할 소설가의 결기마저도 속류로 만들고야 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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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언덕 2004-11-1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맘 먹고 토지 전집을 사고 나서 얼마 안되어 청소년본이 나온 걸 보았습니다. 분량에 압도당한 딸애에게는 청소년본이 어울리는 게 아닌가 고민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싶네요. 문구점에서 볼 수 있는 만화로 보는 상도, 홍길동전 등 류는 아니겠지만 우리 청소년들이 치루어야 하는 목적있는 글 읽기의 서글픈 결과물이군요.

느티나무 2004-11-1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실에 있어 보면 청소년 토지를 찾는 녀석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못마땅하긴 했는데, 왜 그러는지 제가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런데 이 글을 읽고 나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목만 같을 뿐, 다른 책이라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