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철 (순천 효산고등학교)

   영어듣기평가가 있는 날은 학교가 좀 어수선합니다. 3교시가 시작되는 11시 정각에 듣기평가 본방송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3교시 수업이 있는 교사는 평소보다 5분 먼저 교실에 들어가 시험지를 나누어 주어야 하고 학생들도 시험이 끝난 뒤에야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습니다. 듣기평가가 끝나면 약 20분 가량 시간이 남는데 그것도 처치 곤란입니다. 듣기평가 시험을 30분 앞당겨 시행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지요.

   아무튼 이런 저런 이유로 듣기평가가 있는 날은 영어 교과서 대신 팝송 책을 가지고 교실에 들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팝송으로 수업을 하는 것이 생각처럼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과거와는 달리 시적이고 낭만적인 가사에도 눈을 반짝이거나 귀를 쫑긋하는 아이들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대신 상금으로 내건 500원짜리 동전 하나에도 눈이 갑절은 더 커지는 아이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지요.

그날 우리가 배운 팝송은 <아바>의 'I have a dream'이었습니다. 첫 가사가 이렇게 시작되지요.

I have a dream, song to sing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나에게는 꿈이 있어요. 부를 노래도 있구요.
어떤 일이 닥쳐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지요.)


저는 칠판에 노래 가사의 앞부분을 먼저 적은 다음, 좀 떨어진 곳에 'cope with a difficulty (어려운 문제를 잘 처리하다)'라는 문장을 따로 적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꿈을 가지면 어려운 일도 잘 이겨낼 수 있을까요? 꿈을 갖는 것과 어려운 일을 이겨내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교사에게는 이런 순간이 가장 괴롭습니다. 사탕 하나라도 내걸어야 눈이 빛나는 아이들에게 순수한 호기심을 요구하는 것은 교사의 욕심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말입니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시를 한편 끝까지 읽어 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한번만 들어 달라고 사정을 하다시피 해서 시를 읽기 시작하면 불과 이삼초가 못되어 여기 저기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이들에게 유익한 교훈이 담긴 말을 해 주고 싶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듣게 하려면 큰 소리를 치거나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해야 하는데 아름다운 시를 소개하거나 좋은 말을 해 줄 거면서 그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보니 가끔은 이런 엉뚱하고도 엄청난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거 칼입니다. 보드 마커가 아니고 진짜 칼이란 말입니다. 이 칼이 어쩌다가 여러분 손에 들어왔습니다. 눈앞에는 정말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못 살게 구는 불량배일 수도 있고 아버지의 사업을 망하게 한 직업 깡패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술이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고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물론 그 사람을 죽이고 나면 살인자로서 지명수배가 되고 감옥에 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중 일은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 사람을 죽이고 싶습니다."

시나리오에도 없던 말들이 제 입에서 쏟아져 나오자 흩어졌던 아이들의 눈길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초점 없이 허공을 맴돌던 아이들의 눈망울도 하나 둘 켜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뒤에 이렇게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꿈이 없다면 그 사람을 죽일 가능성이 큽니다. 반대로 여러분에게 꿈이 있다면 그 순간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 살인자가 될 운명에서 여러분 자신을 구해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왜 그럴까요? 누구 한번 말해 보세요?"

무언가 감을 잡은 듯 몇몇 아이의 눈길이 진지해지고 있었지만 막상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저는 조금 더 기다려 주었습니다. 드디어 한 아이의 입이 실룩하는 것을 알아채고 말을 해 보라는 뜻으로 그 아이에게 눈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그러니까, 그 사람을 죽이고 나면 감옥을 가게 될 거고, 그러면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맞았어. 그 사람을 죽이고 나면 자신의 꿈도 함께 산산조각 나고 말겠지. 그러니까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은 함부로 살인을 하지는 않겠지. 인생을 함부로 살지도 않을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꿈을 가져야 해, 말아야 해?"

"가져야합니다."

저는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칠판을 향해 잠시 몸을 돌려야 했습니다. 더할 수 없이 진지해진 그 아이의 눈빛에 그만 감격하여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기 때문이지요. 그날 두번째 눈물을 흘린 것은 그로부터 5분쯤 지난 뒤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구체적인 꿈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팝송을 배우고 있는데 이 노래를 끝까지 잘 배우는 것도 여러분의 꿈을 이루는 한가지 방법이에요. 왜 그럴까요? 한번도 그래 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한 일이니까 우선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 열심히 하면 내일도 열심히 하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면 학교 생활이 즐거워지고 아침에 눈을 뜨면 행복한 기분이 들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오늘 이 노래를 끝까지 배울 수 없다면 내일도 그럴 거고 모레도 그럴 거고 여러분은 여전히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고 말지요.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여러분의 꿈을 이루는 시간일 수도 있다는 선생님의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습니다."

두 아이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대답에 저는 다시 한번 울컥해지고 말았습니다. 비록 기계적이고 단순한 대답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갈참나무가 되기 위한 도토리의 꼼지락거림일 수도 있기에 저의 감격은 결코 감정의 과잉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재빨리 칠판 쪽으로 몸을 돌려 눈물을 훔치고는 서둘러 나머지 가사를 읽고 해석해주었습니다.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
I believe in angels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I believe in angels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당신이 동화 속의 그 신비로움을 볼 수만 있다면
설혹 실패한다고 해도 당신은 미래를 지켜나갈 수 있어요
나는 천사를 믿어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는 선한 것이 있음을
나는 천사를 믿어요
때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난 시내를 건널 거예요
난 꿈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세번째 눈물을 흘린 것은 '때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난 시내를 건널 거예요'라는 대목을 설명하는 도중이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초롱하고 예쁜 아이들의 눈망울에 목을 적시며 이런 말을 던지던 바로 그 순간이었지요.

"시내를 건넌다는 것은 새가 알을 깨고 창공을 향해 날아가듯이 나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간가는 것을 뜻하지요. 이것은 일종의 도전이기도 해요. 그래서 꿈을 가진 사람만이 시내를 건널 수 있어요. 이룰 꿈이 없는데 뭐 하러 힘들게 시내를 건너겠어요? 여러분 축하드려요. 오늘 이 노래를 끝까지 배웠잖아요?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여러분도 작은 시내를 하나 건넌 거예요. 지금 여러분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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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언덕 2004-11-0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눈물을 글썽거린 것이 감정의 과잉은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바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잊었던 나의 꿈들과
이제 자라나고 있는 제 딸 아이의 꿈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집니다.

느티나무 2004-11-05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을 읽고 서재에 옮겨오면서 아바의 노래를 줄곧 들었답니다. 아이들에게 어떤 꿈을 가지게 해야 할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정작 아이들의 꿈에는 둔감한 것 같아 미안하네요. ^^

모래언덕님,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suyeo-ni 2004-11-1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곧 고3이 되는 딸아이가 있습니다 . .

옆의 동료에게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눈을 크게 뜨고 껌벅거리는 중입니다.

현실은 늘 팍팍하지만, 이런 따스한 글들을 만날 때 가슴속으로 한줄기 시냇물이

흐르는 느낌 . . . 건강하세요 !




느티나무 2004-11-10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글을 읽고 공감하셨다니 감사합니다. 님도 좋은 하루 보내시고, 고3 따님도 힘내셨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