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 푸른 숲, 1992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 아니며, 고소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고상함을 드러내보여야 한다. 여기에서 말한 고상함이란 그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의 초연, 선과 악에 대한 동일시이며, 동정의 눈으로 세계를 대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심정 속에서  나는 미국 민가 <톰 아저씨>를 들었다. 노래 속의 그 늙은 흑인 노예는 일생 동안 고난을 겪었고, 가족은 모두 그보다 먼저 가버렸다. 하지만 그는 의연한 태도로 세계를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원한서린 말 한마디 없다. 이 노래는 나의 심금을 울렸고, 나는 이러한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사람이 고난을 감수하는 능력과 세계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써나갔다. 글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내 스스로 고상한 작품을 써나갔다고 생각한다.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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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11-10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정의파들의 위선

사람은 생존해야 한다. 하지만 그 목적은 진화를 위해서다.

괴로움을 견디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목적은 장래의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전투도 더욱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목적은 개혁을 위해서다.

남의 자살을 비난하는 자는 비난을 가하는 한편 사람을 자살로 내모는 환경에 도전하여 공격을 가해야한다.

암흑의 중심 세력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화살 하나 날리지 않으면서 약자에게만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자가 있다. 그가 아무리 정의파라고 하더라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나는 정말 참을 수 없다. 그들이야말로 살인방조자들이라고.

 

루쉰 [희망은 길이다-루쉰 아포리즘], 이욱연 편역, 이철수 판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