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학교에 계신 어떤 선생님께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권해드렸다.(타고 나기를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지 남들한테 추천도 많이 하고, 간섭도 많이 하는 것 같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 관심을 보이시길래, <서양미술>을 먼저 보시면, 서경식을 좀 아시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다.(물론 선생님께서는 이미 <소년의 눈물>을 읽어본 적이 있다고 하셨다.) 이후에 별 말씀이 없으시길래 잊으셨나 했더니, 오늘 "선생님은 서경식의 책이 왜 좋으신가요?" 라는 질문을 하셨다. 어제 밤에 서양미술 순례를 읽다가 소개된 그림도 잔인하고 징그러운데다가 글의 내용도 한없이 우울해서 읽고 나니 무섭고 마음이 착 가라앉아서 힘들었다고 하셨다.
지난 1년 동안 같은 학년을 하면서 함께 애썼던 선생님께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셨다. 마침 오전에 저 말씀을 하신 선생님도 함께 하시기로 했다. 허름한 대구탕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미술순례에 나오는 그림 이야기로 시작해서 고흐와 동생 테오 이야기, 서경식의 형들(서 승, 서준식) 이야기로 이어지고,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 나오는 참고도서 목록 이야기로 건너갔다가, 방학 때 홀딱 빠져서 읽을 수 있는 장르소설 이야기도 잠깐 하고, 대하소설 ‘혼불’과 ‘토지’ 이야기도 곁다리로 끼였다가, 소설 갈래의 문체와 구성 이야기까지 흘러서 국어교사 셋이서 먹는 밥상이 제법 이야기거리로 풍성했다.
점심을 먹고 와서 내 자리에 앉아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또 바쁘게 학교 일을 하며 지냈다. 내일이 겨울방학식을 하는 날이라 이것저것 공문서 작성을 해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또, 겨울방학 때 독서토론 특강을 듣는 학생들에게 내 줄 과제도 만들었다. ‘원자력 시대, 앞으로도 가능할까?’라는 주제 아래 세 명의 교사가 각각 책읽기, 토론하기, 글쓰기 영역을 맡아서 특강을 진행하는데, 오늘까지 학생들이 책을 읽고 준비해야 할 과제를 미리 내주었다. (나는 책을 읽고 어떻게 내 생각을 정리할까, 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갈 생각인데, 이건 다른 페이퍼에 써야겠다.) 3시 50분부터는 도서실에서 김규항의 <예수전>으로 독서토론 동아리 모임도 했다.
모임이 끝날 때쯤에 본가에서 급한 전화가 와서 허둥지둥 나섰다. 단독주택 4층인 본가는 언제나 썰렁하다 못해 냉기가 돈다. 집의 구조가 남향이 아닌데다가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서 보통 때는 전기장판만 사용하기 때문인데, 부모님의 성격상 아무리 돈이 있어도 방을 따뜻하게 데우는데 돈이 든다면 외투를 입고 지낼 것이다. 아무튼, 본가에서 저녁을 먹고 제법 늦게 집에 돌아왔다.
결국, 점심을 먹고 나서는 아침에 있었던 서경식의 책 이야기는 까맣게 잊었다. 그러다가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고 알라딘에 들어와서야 선생님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선생님은 서경식의 책이 왜 좋으신가요?" 그 때 한 마디라도 대답을 했으면 모르겠는데, 나 자신도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인데, 한 번 떠오른 그 질문이 쉽게 잊히지 않아서 이렇게 내가 사서 읽은 서경식의 책을 쭉 펼쳐 놓았다.
아마 7,8년 전쯤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시작되었을 나의 서경식 읽기는 청춘의 사신, 고뇌의 원근법 등의 미술 분야 책으로 이어지고, 디아스포라 기행,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쁘리모 레비 등의 기행기나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책에도 관심이 커졌다.(특히, 쁘리모 레비를 읽고 나서는 마음이 먹먹해서 몇 번이나 리뷰를 쓰다가 끝내 완성할 수 없었다. 이 때만큼 내 글쓰기 능력이 참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후엔 조금 딱딱하게 느껴졌던 난민과 국민 사이와 고통과 기억의..도 있었고, 3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최근의 펴낸 서양음악 순례까지!
내가 지금껏 본 서경식의 모든 책에서 나는 늘 ‘성찰하는 자세’를 읽는다. 방금, ‘읽는다’라고 했지만, 이건 글자로 써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글의 행간에 배어있는 어떤 분위기, 라고 말하는 게 옳다. 처음 서양미술 순례는 서양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 때문에 읽게 되었는데, 정작 이 책에는 그림에 투영된 화자의 인식이 더 중요한 책이었다. 당시의 화자의 인식은 피지배자의 후예로서 과거의 식민지 지배국에서 소수로 살아가는 자신과 가족의 삶에 대한 정체성, 조국의 감옥 안에 있는 형들을 둔 아우로서 감당해야할 운명의 무게에 대한 성찰, 우리 민족의 감당해야 했던 고단한 삶의 흔적과 세계사에 대한 일반적 통찰 같은 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이런 인식은 이후 여러 방면으로 확산되는데, 첫째, 그림에 대한 관심과 그 그림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배경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청춘의 사신’, ‘고뇌의 원근법’ 등으로 이어진다. 둘째,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옛 지배국의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의 아이러니를 ‘소년의 눈물’이라는 책으로 나타내었다. 셋째,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 온 이후 그 사실을 믿지 않으려던 전 세계에 대해 ‘이것이 인간인가’ 같은 책을 통해 증언해 온 유태인 쁘리모 레비에 대한 동질감과 현대 일본의 과거 부정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내비치고 있기도 하다. 넷째,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로 이어지고 있는, ‘디아스포라 기행’이나 ‘난민과 국민 사이’를 들 수 있다. 이 모든 책들이 내 머릿속에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거나, 내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 책이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살아보니 어떤 문제의 원인은 대부분 나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은 무척 고통스럽다. 그래서 늘 바깥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발버둥 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는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결국 내 안에 깊이 침잠해서야 문제의 원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 때쯤해서야 서서히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곤 했다. 그래서 나는 경험으로 ‘성찰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안다.(이것을 실천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능력의 문제지만) 서경식의 책은 나에게 늘 자기를 들여다보는 자세를 일깨운다. 그런 자세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고, 또한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모색을 해 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나야 이름 없는 평범한 교사로 살아갈 뿐인지라 서경식의 엄정함과 예리함을 따라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의 자세만은 오롯이 닮고 싶다. 이것이 내가 서경식을 읽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