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에 복이는 폐렴에 걸렸다. 조금 낫는가 싶더니 다시 감기. 이후 지금껏 계속 감기를 달고 살았다. 지금도 감기약을 먹는다.(아마 녀석이 먹은 감기약이 내가 지금껏 먹은 모든 약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 핑계로 지난 토요일에도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었다. 집에서는 컴퓨터에서 소파로, 다시 컴퓨터로 왕복운동(?)을 한다. 아마 이것들이 없으면 심심해 죽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유일한 나의 애청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지난주 특집인 ‘스피드’는 태호 피디의 천재설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일요일 오전도 늦잠으로 지내다 나랑 같이 새장 같은 집에서 뒹구는 녀석이 불쌍하게 보여서 놀라가자고 했더니 좋다고 따라 나선다. 나올 때는 자전거 가게에서 타이어 공기 좀 넣고, 구민운동장 옆 자전거도로를 쉬엄쉬엄 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타이어 공기를 넣고 나서 어쩌다 보니 우리 학교로 들어왔다. 좋다고 따라오는 녀석에게 일단 자판기 코코아를 한 잔 먹이고, 빈 교실에 들어가서 선생님 역할 놀이를 했다. 녀석이 선생님 흉내를 내면서 칠판에 낙서를 한다. 제 이름만 겨우 써 놓고, 마구잡이로 선 긋기를 하고 있다. 녀석, 즐거워 보인다.

   나는 책상에 앉아 그 모습을 본다. 녀석은 학생이 되어서도 학교에서 저렇게 행복한 웃음을 터트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씁쓸하게도 결론은 금방 내려진다. -아무래도 어렵겠지? 한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래 내 아이만은…… 욕심을 버리자.

   학교에서 나와 태화마트에 들렀다. 평소에도 가리는 것 없이 잘 사주는 편이지만, 나랑 둘이 있을 땐 뭐든 제가 먹고 싶은 걸 골라준다. 녀석은 봉지에 사자 그림이 그려진, 카프리 썬을 집었다. 싱글벙글이다. 나도 새우깡 한 봉지를 챙겼다. 자전거에 달린 바구니에 싣고 나오다가 발견한 아파트 작은 놀이터. 녀석이 놀다가 가자고 한다. 잠시 미끄럼틀에서 놀다가 다시 구민운동장으로 가는 길, 자전거 위에서 녀석이 말한다. “아빠, 가을 햇볕이 참 따뜻하고 좋아!” 녀석이 씩 웃는다.

   전에도 가 본 적이 있는 강가의 나무데크에 앉으니 녀석은, “아빠, 목말라!” 녀석의 뻔한 작전. “알았다, 그럼 나중에 목말라도 마실 게 없으니 참아야 한다.” “응, 당연하지” 이제 녀석은 카프리 썬을 쪽쪽 빤다. 나도 새우깡을 뜯어서 서걱서걱 먹는다. 녀석이 불안한 눈길로 나를 본다. 결국 자기 몫의 새우깡을 챙긴다. 커서도 제 몫은 챙길 녀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일까? 진짜 가을 햇볕이 따사롭다. 물결이 잦아드는 시간.

   구민운동장으로 가는 길도 도로가 새로 나서 자전거로 달리기엔 참 좋다. 녀석은 이럴 때 항상 시합을 하자고 한다. “아빠, 우리 누가 빨리 달리나 시합하자!” “왜?” “나 1등하려구!” 경쟁은 인간의 본능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 잡생각은 다음에. “그래 좋아. 그럼 누가 빨리 달리나 해 보자. 준비, 시~작!” 이 말과 함께 녀석과 나는 달리기를 한다.

   운동장에 사람이 많다. 나는 잔디 위에서 축구하는 사람을 부러운 눈길로 본다. 녀석은 운동기구에 눈길이 간다. 벌써 자전거를 옆에 세우고 운동기구에 매달려 있다. 이것저것 다 한 번씩 해 본다. 하다가 힘에 부치면 항상 이렇게 외친다. “아빠, 도와줘~” 그럴 때마다, 나는 “기다려, 갈게”라고 하면서 간다. 아직 녀석에겐 내가 수퍼맨이다.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요즘이다. 그냥 무심하게 흘려버리는 시간들, 시간들…… 방학이라고, 좀 집중해서 읽어야 할, 몇 권의 책도 펼치기 싫어서 팽개쳐둔 지도 오래. 책 한 권 펼치지 못한 시간이 한 달이 다 됐다.(그래도 가방엔 늘 책 넣고 다닌다. 왜 넣고 다닐까, 읽지도 않을 책을!)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어느 분이 옮겨 놓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

   특별히 긴장하지 않으면 삶은 대체로 자신이 가장 편안하다 여기는 쪽을 향해 흘러간다.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례들도 실은 그렇다. 어떤 이가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어 보일 때, 그는 삶을 바꾸려드는 순간 더 큰 불행이 올 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어떤 이가 고난의 길을 자청하고 있을 때, 그는 그 고난을 피하면 겪게 될 마음의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마음의 자질이 존경받을 만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물며 그렇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태만하고 진부한 '편안함의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때로 이런 의문과 마주치는 것마저 피하기는 어렵다. 나는 왜 내가 아는 세상만을 살고 있나? 나는 왜 내가 아는 나로만 살아가는가? 그럴 때 어렵고 신기한 시를 읽는 일은 특별한 일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고 두꺼운 책도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어렵고 신기한 시를 읽을 때면 그런 것들은 문득 소용이 없어지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처음 보는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왜냐하면 시란 "내가 최초가 되어 최초의 사물을 바라보는 것"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이 글에 따르면 누구나 몸과 마음의 편안함의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고 하니까 나만 특별할 것은 없다. 그렇다면 왜 나는 편안함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을 나에게 던져보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늘 익숙한 질문을 던지고, 틀에 박힌 대답을 스스로에게 한다. 그걸 나 자신은 성찰, 이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 그 자체이다. 물론 그 기저에는 낯선 세계에 대해 유독 두려움을 크게 느끼는 내 성정 탓도 있을 게다.(성격이나 기질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안전한 자기합리화!)

   낯선 시는 낯선 세계.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세계 밖의 세계. 새로운 질서의 세계다. 그러니 내가 시를 읽지 못하는 것. 나는 낯선 시가 아직은, 두렵다. (아직은, 일까? 아니면 ‘영원히’ 일까?)

2011년 9월 30일, 느티나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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