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두세요.

   부석사는 건축하는 이들에게는 순례지다. 어떤 이는 가을에 좋다고 한다. 어떤 이는 비 오는 날에 좋다고 한다. 그러나 해 지는 저녁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멀리 굽어보면 소백산맥의 준봉들이 아스라히 보인다. 그 서쪽 모서리에서 해가 질 때까지 있어 보자. 시간이 더욱 흘러 해가 점점 낮아지면 서쪽 하늘이 물들면서 우리는 뭔가 범상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된다. 해가 지는 위치는 매일 조금씩 바뀐다. 그러다가 자개봉의 정봉 끝으로 해가 지는 날이 있다. 그 날이 바로 춘분이다. 당연히 추분일 때도 마찬가지다. 춘분날 저녁에 마당 모서리에 서 보라. 그렇다. 뾰족이 솟은 바로 그 봉우리 끝으로 해가 진다. 해가 진 그 곳, 서방 정토와 자개봉과 세사에 찌들었던 내가 일직선 위에 서는 것이다. 그 순간 다시 뒤를 돌아보라. 석등과 석탑도 바로 그 선 위에 도열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서방 정토을 향해 있는 우리의 뒤편을 석가의 현신인 석탑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춘추분이라는 시기가 신라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부석사에서 공간의 설계가 이룰 수 있는 초월적 극치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위대한 음악이다. 서쪽 하늘 가득히 펼쳐지는 침묵의 음악이다. 그 음악은 저녁 예불 때 산사 가득 울려 퍼지는 법고 소리처럼 우리의 가슴을 두드린다.

   부석사는 경전이다. 공간으로 쓰여진 경전이다. 그리고 이를 만들어 낸 이의 마음의 끝은 후대의 건축가가 근면함만으로는 도저히 좇아갈 수 없는 초월적인 경지인 것이다.

서현,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중에서. 249-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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