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현, 효형출판, 2004
한국의 빛나는 전통 문화라는 것이 오늘날에도 반드시 그대로 모방 답습되어야 한다는 정태적 피해 의식은 21세기의 어딘가를 달리고 있어야 할 건축가들의 발목을 잡아왔다. 기와 지붕과 처마 곡선미만으로 전통 건축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실제로 전통 건축을 제대로 본 적이 있었는지 자문하여야 한다. 용마루에서부터 죽죽 뻗어 내린 기왓골과 서까래의 박력을 본 적이 있는지, 막새 기와의 의미를 찾아본 적이 있는지 자문하여야 한다. 날아오르는 거대한 새의 날개 같은 처마를 처연하게 선으로만 해석하는 한 "조선 역사의 운명은 슬픈 것이다"라는 1910년대 이국인의 미의식에서 우리는 한 발도 더 나갈 수 없다.
전통은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지 모양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전통 건축을 중국 건축과 다르게 만든 추동력은 '달라지겠다는 의지'다. 그것이 우리의 보편적 전통이다. 용솟음치는 창작 의지가 우리의 전통이다. 진경산수를 만든 힘이다. 전통 박물관은 꼭 기와집 모양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지금도 도포 자락을 휘날리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우리는 신라 시대의 금관을 조선 시대에 복제해 만들었다고 그것을 가치롭게 여겨 박물관에 들여놓지 않는다. 고려 시대의 청자가 조선 시대의 도공에게 강요되었다면 우리에게 백자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는 12세기의 어딘가에서 머물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밋밋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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