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네트워크, 한겨레신문사, 2003
'테러리스트' '강경파 이슬람근본주의자' 나는 내 이름 앞뒤에 늘 따라붙는 이 단골 용어들을 이스라엘이나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붙여 준 거룩한 '존칭'쯤이라 여기며 별로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일이 하나 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과 미국은 적합하지 않은 용어로 나를 불러왔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해온 가장 중요한 화두는 중용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일생 동안 '엄격'과 '관용' 한가운데 지점을 따라 걸어온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미국이 나를 '극단주의자'니 '근본주의자'니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건 어리석은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도 미국도 모두, 불법 침략자에 대항하는 일은 한 사회와 그 구성원이 지닌 가장 기초적인 권리이자 의무라고 가르쳐 오지 않았을까?
자, 여기 나라는 개인을 놓고 보아도, 나는 법적 권리를 지닌 주체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침략해서 강점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의 한 주인이다. 만약 외국 군대가 한국을 침범해서 당신과 가족들을 쫓아냈고, 그래서 조국을 찾고자 투쟁해 온 당신에게 누가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면 어떨까? 마찬가지로, 조국 팔레스타인 땅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해 온 나를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트라 불러도 좋을까? 만약 그 대답이 "예스"라면, 나는 그 칭호들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으로 간직할 것이다.
-263쪽
* 얼마 전에 이스라엘의 '테러'공격을 받아 죽은 팔레스타인 무장저항단체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아흐메드 야신의 글이다. 그의 글 속에서 '중용'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힌다. 그는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을 간직한 채로 죽었다. 사람들은 테러가 나쁜 짓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할 때 그가 '테러리스트'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함께 말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가 가는 길이 '중용'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더 나쁜 사람과 견주어 보며 '그래도 나는...'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자신이 중용을 지키며 산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아마 괴로워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