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장미
- 안준철, 세상 조촐한 것들이, 내일을여는책, 2001
주번 교사 하던 날이었지
흰 종이 쓰레기 한 점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려 있었어
누군가 손에 쥐었다가
무심코 버렸으리라
생각하며 허리를 굽히는데
세상에, 그게 흰 장미인 거야
이슬 같은 물기를 머금고
생글 웃고 있지 않겠어
자세히 보니 제 몸에 가시를 박은
한 줄기 초록빛 가녀린 선이
측백나무 울타리 속에 비집고 올라와
흰 장미 한 송이를 후끈 피워 놓은 거야
나는 생각했지
처음에는 그 흰 장미가
정말 종이 쓰레기였을지도 모른다고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린
찢겨진 한 영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허리를 굽혀
다가가기 전까지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