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김 훈의 두 번째 세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불편하다. 자신이 어느 쪽에 서 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든 대부분은 이 책에서 날카롭게, 의뭉스럽게, 혹은 치열하게 내뱉는 소리에 당혹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는 가정은 그만두자. 김 훈식으로 말한다면 그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다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조바심이 났다. 내 생각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진 느낌이었고, 책의 어떤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아주 입맛이 썼다. 이 '리뷰'를 쓰면서 내 불편함의 이유를 찾고자 했는데, 인터뷰 중에 이런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현장에 나와보니 삶의 바닥은 지극히 난해한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수많은 욕망과 생각의 차이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삶의 현장이다. 무수한 측면과 측면들이 저마다 정의라고 주장한다. 점점 판단을 정립하기 어렵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는 근원적 문제보다 존중과 타협이 중요하다. 그 어느 것도 절대 선이라고 주장할 수 없고, 절대 악으로 반박될 수도 없는 나름의 사연과 치열함이 현장을 복잡하게 만든다.(사무라이, 예술가 그리고 김훈, 236쪽)

   그가 지금껏 이런 관점으로 글을 써왔다는 점에서 보면 이 말은 분명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새삼 '절감한다'고까지 말한 것은 과장일 수도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오랜 기자생활에서 나온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글쓰기를 너무 과신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이 같은 그의 생각은 이 책 전체에 일관되게 보여지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이 총체적 비극의 지옥 속에서 한 포로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얼마나 무력하고 가엾은가. 그러나 이 가엾음을 진실로 가엾게 여기지 않는다면 인간은 왜 이래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영원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고통의 근원을 사유하며, 86쪽)

   우리는 사실의 바탕 위에서만 화해하거나 청산할 수 있다. 화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불화와 단죄조차도 사실의 바탕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화해할 수 없는 것들과의 불화는 역사를 도덕적으로 긴장시켜 줄 수 있다. 그리고 치욕의 역사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에 의하여 불화는 더욱 깊어져가고 있다. (치욕, 105쪽)

   김윤식 씨의 큰딸 김선명 씨는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한다. 김선명 씨뿐 아니라 이 카지노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 지방 광부의 자녀들이다. 젊은이들은 카지노, 호텔로 변해버린 고향을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김선명 씨는 "옛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양쪽 다 내 고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늙은 광부가 진폐로 쓰러져가고 인간의 삶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져가고 있었다. (인간은 수몰되지 않는다, 179쪽)

   나는 아직도 어린 탓인지 이런 문제를 '당위'로 해결하려고 든다. 그러나 김훈의 공세적인 질문은 나를 압박한다. 나의 당위적 인식이 현장의, 사실의 무수한 다른 측면을 아니냐고. 나는 내가 당위로 여기는 여러 문제들을 잘근잘근 잘라서 내가 못 본 다른 단면들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는 그가 못마땅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때문에 내 인식의 틀이 무너지는 것을 불안해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삶의 현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고, 어부와 함께 배를 타기도 하며 현장 기자가 되기도 한다. 그가 현장을 겪으면서 예리하게 지적하는 세설은 독자들의 엉성한 인식의 틈새를 가볍게 허물고 저만큼 가버린다. 그의 세설은 사람들을 한 대 쳐놓고, 맞은 사람이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사뿐히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가 늘 중요하게 여기는 '현장에서 본 사실' 중심의 글쓰기는 어떤 사건의 과정과 흐름의 맥락 속에서 '판단'하지 못하는 오류를 낳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표적인 부분이 '아이들은 청순하기만 한데'인 것 같다. 내가 잘 모르는 '치열한 현장의 사실'이 있는지 몰라도 이 같은 '양비론'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과연 어떤 사건의 여러 측면들을 보여주면 그가 찾고자 하는 '사실'의 진실은 드러나는 것일까. 의문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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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2-0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이 느티나무가 그 느티나무였군요..ㅋㅋ 우연히 만나게 되니 반가운걸요~
그의 '양비론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면서도 별다섯을 주셨군요. 사봐야겠어요. 개인적으로 김훈체를 좋아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