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 지음, 그린비, 2003

   연암은 일행들과 꼭대기에 올랐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장성은 북으로 뻗고 남으로 흐르고, 동으로는 큰 벌판에 이르고 서로는 관 속을 엿보게 되었으니, 이 대만큼 조망이 좋은 곳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내려오려 하니 문득 사람들이 '고소공포증'에 기가 질린다. "벽돌 쌓은 층계가 쭈뼛쭈뼛하여 내려다 보기만 하여도 다리가 떨리고 하인들이 부축하려 하나 몸을 돌릴 자리가 없어서 일이 매우 낭패한 지경이다" 연암은 "서쪽 층계로 먼저 간신히 내려와서 대 위에 있는 여러 사람을 쳐다보니, 모두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올라갈 땐 멀쩡하다 갑자기 왜? 연암의 설명은 이렇다. "대개 오를 때엔 앞만 보고 층계 하나하나를 밟고 올라갔기 때문에 그 위험함을 몰랐더니, 급기야 내려오려고 눈을 한 번 들어 밑을 내려다 본즉 저절로 어지럼증이 생기게 되니 그 허물은 눈에 있는 것이다" 눈, 곧 시각이 분별심을 일으키고, 그 순간 두려움에 끄달리게 된다. 그가 보기에 인생살이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벼슬살이도 역시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때엔 일계, 반급이라도 남에게 뒤떨어질까 보아서 혹은 남을 밀어젖히고 앞을 다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매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기니 외롭고 위태로워서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길 낭떠러지인 까닭에 다시 올라갈 의욕마저 끊어졌을 뿐더러 내려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니 이는 고금이 없이 모두들 그러한 이가 많을 것이다." 맞다! 이 심오한 인생철학은 시대를 가로질러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특히 부와 명성을 향해 질주하는 눈먼 현대인들에겐 더더욱.

223-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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