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 밀양여름예술축제에 다녀왔다. 밤 10시에 공연하는 오구... 이제 10년이 된 지역 예술축제의 간판극답게 강부자, 오달수, 하용부와 연희단거리패가 함께 하는 초호화 캐스팅이다. 야외에 마련된 좌석도 무려 1500석.

   배우들의 이름을 보니 좀 설렜다. 오달수 씨 때문에... 강부자 씨는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고(그래도 배우로선 살아 온 인생이 벌써 반세기라면 배우의 능력에 토를 다른 것은 실례다.), 오달수 씨가 부산에서 공연할 때 극장에 서너번 가서 본 적이 있다. 음, 정동숙 씨와 함께 '너도 먹고 물러나라'라는 공연을 하는데 정동숙 씨는 관객을 빨아들이는 열정이 넘쳤고, 오달수 씨는 치고 빠진다고 해야 할까, 관객의 감정을 긴장시켰다가 풀어 주는 능력이 탁월했던 기억이 난다. 마치 밀양에서 전도연의 연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허허실실의 송강호처럼.

   그리고 또 한 사람, 밀양백중놀이 기능보유자로 밀양연극촌장인 하용부다. 처음엔 진옥섭의 노름마치에서 하용부, 하보경. 하XX, .... 이런 사람들의 이름이 겹쳐져서 극이 시작될 때만 해도 춤꾼 하용부 선생이 맞나 싶었으나, 극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서 북을 어깨에 을러매어 치면서 춤을 추는데 '딱' 감이 왔다. (사실, 나는 소리에도 춤에도 완전 까막눈이다.) '앗, 보통 춤과 소리가 아니구나!' 연극을 보는 동안에도 특히 집중해서 봤다.  

   연극을 보고 집에 와서 노름마치를 펼치니 바로 하용부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다시 한 번 정독하고,(이때가 새벽 2시 반?) 학교에 가져가서 같이 본 샘들에게 복사본을 나눠드렸다. 그리고 아직도 하용부 선생의 북소리와 춤사위가 어른거려서 이렇게 동영상을 찾고 기사를 검색해 봤다.

   그러다가 다시 흐릿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하용부 선생과 둘러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연극을 본 후에 그 연극에 대해서도 감상평을 전했던 기억이 났다. 꽤 지난 일이기 하지만, 어느 겨울 밀양연극촌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갔었는데, 우리 일행(함께 학급운영 모임을 하던 선생님들이랑 밀양으로 여행을 갔었다.)들이 좀 일찍 도착해서 건물 밖에서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드럼통에 불을 지펴지니까 자연스럽게 그 주위에 둘러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분이 바로 하용부 선생이었다. (그때 우리 중 누군가가 궁금해서 뭐하시는 분이냐고 하니까, 그냥 '지역에 사는 백수'라고 하셨던 것 같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과 뒷풀이(?) 비슷한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하용부 선생도 함께 자리에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었다.  

   아무튼 이런 오구-죽음의 형식, 공연에서 하용부 선생의 춤과 북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 큰 행복이었다. 비록 그 피로의 여파가 아직까지 미치고 있지만...... 

* 아래는 궁금해서 찾아 본 하용부 선생의 인터뷰 관련 기사

   195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다섯 살 소년은 할배의 춤사위를 보며 우리네 움직임과 소리를 익힌다. 밀양백중놀이를 이끈 할배와 같은 길을 걸어온 것이 벌써 50년이다. 한국적인 양식을 고민하는 무대라면 어디라도 서슴지 않고 찾아가는 한국 춤의 세계적인 전도사 하용부(54,중요무형문화재 68호) 선생을 만났다.  







   그가 '춤꾼'으로 살아온 5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 춤판을 열었다. 이 춤판은 영남의 춤을 대표하는 그가 프랑스 공연예술의 자존심으로 통하는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무대에 서기 위한 시연공연으로 준비한 것이다. 한국 전통 춤꾼으로는 프랑스 '상상의 축제((Festival de L′imaginaire)'에 정식으로 초청된 것이 처음이기에 하용부 선생의 춤판은 여느 때보다 절로 흥이 솟는다.

프랑스 파리가 선택한 한국춤의 자존심…중요무형문화재 68호 하용부 선생

   '하용부 춤판 2009'의 리허설 공연에 경의를 표하는 기자에게 "늘 춰오던 춤인 것을 모…, 공연도 아닌 것을…" 이라며 털털한 웃음으로 온 몸에 비 오듯 흘린 땀을 닦으며 기꺼이 인터뷰를 응했다.

   "내가 다섯 때부터 춤을 췄다. 할배 좇아 추던 춤이 스물다섯 되니까 중요무형문화재라고 정식으로 제도권에 인정됐다. 그때서야 제대로 인정받은 것이다. 97년에 조부가 돌아가셨다. 조부가 살아 생전엔 내 감히 이런 걸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스승이 살아계시는 데 어찌 제자가 이런 걸 생각 하겠어…."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춤'만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하용부 선생은 이제서야 자신의 이름을 건 '춤판'을 벌인 것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전쟁에다 민주화운동에다 사회적인 혼란도 있었고 전통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적인 그런 복잡한 시대였기 때문에,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전통을 되짚어 어떻게 해볼만한 때가 아니었다. 전통에 대해 나조차도 모르는데, 어떻게 전통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이제 그런 시대는 아니지 않나 싶다. 나 역시 현대 몸짓에 대해
이윤택(연극 연출가)을 만나서야 알게 됐고, 이제까지 내 '춤판'이 늦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판을 벌려도 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화하는 한국의 '전통 춤'… 현대와 소통하는 '우리 춤'

   하용부 선생은 1989년 연극연출가 이윤택 씨를 만나 의기투합해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 안무가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는 연극 '오구-죽음의 형식'을 시작으로 '죽은 영혼' '길 떠나는 가족' '어머니' '일식' 등에 안무가로 참여한다. 이를 통해 '한국적 몸짓'을 연극무대에 담아 안무는 물론 연기까지 욕심을 부렸다.

   밀양과 서울을 오가며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는 그는 SIDance와 춘천아트페스티벌 등 국내 유명 페스티벌에 초청돼 수많은 무대를 통해 자신의 '춤판'을 벌여왔다. 이 가운데 프랑스 ART 초청 워크숍 지도를 맡기도 하며 프랑스 발드마른 국제댄스페스티벌에 참가하는 등 세계적인 무대에서 '한국 춤'을 알리기 위한 노력도 꾸준했다.

   "지금 이 시대는 전통의 재해석과 보존이라는 두 갈래에서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내가 세계무대에서 기대를 거는 것은 현대와 전통이 공존할 수 있는 방향을 찾길 바라는 것과 지금 이 시대의 '우리 춤'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통을 그대로 보존할 것인가, 현대에 맞게 재해석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해야 할 것인가 그것의 중간지점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하용부 선생의 춤판은 절로 흥을 솟게 한다. 어깨선을 따라 부드러운 손이 하늘을 치켜올리고 버선발을 주춤주춤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해 장난기 가득한 취임새로 자연스레 관객과 마주한다.

   그의 밀양북춤과 범부춤, 양반춤을 비롯해 창작무 영무는 서양예술과 호흡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한국 전통예술의 깊이를 더해 전통의 보존과 현대적 재해석으로 시대가 공감하는 전통예술을 꽃피운다.  

 2010.3.10  [OSEN=박희진 기자] 

 

** 아래는 궁금해서 찾아 본 하용부 선생의 밀양북춤 동영상

 

하용부 선생님의 밀양북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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