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아물지 않고.
어제 밤에는 무척 운 좋게, 깔끔하고 편한 숙소를 구했습니다. 어줍잖은 글이나마 써 놓고 숙소를 잡았으니 무척 여유도 있었습니다. 느긋하게 내일 일정을 정하고 일출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잠도 일찍 잤습니다.
이른 새벽 저도 모르게 잠을 깨고 창 밖을 내다보니 날이 잔뜩 흐립니다. 이것으로 성산봉에서 일출을 보겠다고 어제 잡은 일정은 어그러진 셈이지요. 그래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들었답니다. 한참 후에 깨어보니 어느덧 아침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늦어지는 걸 보니 이젠 몸도 제법 피곤한가 봅니다.
여전히 빵과 우유로 늦은 아침을 먹습니다. 가방을 챙겨들고 느릿느릿 성산봉 아랫동네를 돌아 성산항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햇살이 따갑습니다. 오늘도 날이 푹푹 찌려나 봅니다. 성상항에서 우도로 가는 배를 타고 우도를 둘러보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로로 들어가는 배에서 보니 일출봉의 모습이 마치 코뿔소가 바닷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인 모습입니다. 먼저 소머리 오름에 올라서 제주도의 모습을 보니, 어느새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데, 한라산이 수많은 오름들을 품에서 벌려놓은 듯한 모습이 장관입니다. 소머리 오름에서 바라본 바다는 막힘 없어 보는 눈맛이 시원합니다. 오름의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사진은 찍습니다.

제주도의 오름들(우도에서)
이후에 그 옛날 고래가 살았다는 동안경굴을 지나 고운 산호모래로 유명한 서빈백사를 둘러봤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가장 인상적인 우도의 모습은 때가 덜 묻은 순박한 마을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제주도가 원래 모습이 이랬지 싶은 생각이 들어, 뱃길로 15분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 세월의 시간 차이를 느꼈습니다.
성산읍으로 나오는 배에서는 그냥 드러누워 또 일정을 잡습니다. 배는 야속하게도 금방 닿고 저는 점심을 먹고 움직이려고 어슬렁거렸지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이리저리 머뭇거리다가 번잡한 거리를 빠져나오고 말았습니다.
다시 해는 구름 속에서 나왔고, 곧 이어 땀이 쏟아집니다. 그나마 오른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다 바람 덕에 쓰러지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는가 봅니다. 한참을 걷다보는 조개잡이 체험장에 들렀는데, 저는 물집 잡힌 발이 걱정이 되어 사람들이 조개 잡는 모습만 구경하다 빠져나왔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동작이 굼뜨는 것 같아 걱정이 슬그러미 들어 이제부터는 발걸음을 좀 빨리 놀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빵빵! 하는 차소리. 누가 길을 물어보나 싶어 의아해하고 있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선생님”하고 부릅니다. 이은경선생님께서 여행하시다가 알아보시고 내리셨더라구요. 일행들 때문에 시원한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금방 헤어졌지만, 이런 곳에서도 반가운 사람을 만난 기쁨으로 또 얼마 동안은 힘내서 갈 수 있을 듯 합니다.
점심을 제대로 먹기 위해 찾으려니 또 제법 큰 마을이 안 나타나네요. 오후 4시쯤에야 겨우 구좌읍내에 닿았습니다. 일단 점심을 먹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학교가 개학을 했는지 하얀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로 좁은 읍내가 무척 활기찹니다. 학생들이 예뻐서 몇 마디 말도 붙여 보았는데, 답하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경쾌한지...
점심을 먹고 내일 돌아갈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아무리 걸어도 더 큰 마을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숙소를 구하려고 했답니다. 발에 물집이 더 심해지고 발목이 시큰거려서요. 하루만 푹 쉬면 좋겠는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 그럴 수도 없고 걸음은 더 걷기 힘들고... 그러나 지금 숙소를 잡으면 방값이 조금 비싸거든요. 얼마 전에 만난 변경석선생님의 추천대로 근처에 있는 다랑쉬오름에 오르기로 했습니다. 가방은 마을 끝 빵집에 맡겨두고 가볍게 몸만 움직이기로 했지요.
저 멀리 비자림(榧子林)들 돌아서 다랑쉬오름에 오르려고 하는데 구름이 잔뜩 끼였던 날이 더욱 흐려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변했습니다. 다랑쉬오름의 입구를 못 찾아서 여러 번 헤매고 있었으나, 사람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어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앞은 점점 더 안 보이고... 겨우 찾은 입구는 철망으로 막혀져 있었습니다. 더 어찌해 볼 엄두가 안 나서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는 산길을 그냥 오르기로 하고 가파른 길을 꾸역꾸역 올라갔습니다. 암팡진 막사발을 엎어 놓은 듯한 다랑쉬오름의 오르막 길을 오르며 얼마나 쉬었는지 모릅니다. 그 사이에도 구름은 더해서 이젠 다랑쉬오름과 이웃한 아끈다랑쉬오름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러다 길을 잃지 않을까?' 걱정을 무척 했습니다. 그래도 구름 속인지 안개 속인지를 혼자 걷는 맛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