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9일-여행 여덟째날(지누단다-뉴브릿지-사울리 바자르-비레탄티-포카라)  

   산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가볍게 아침을 맞았다. 날씨는 여전히 청명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컨디션도 좋다. 오늘 저녁은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을테고, 적어도 오돌오돌 떨면서 잠들지는 않겠지. 

   오늘 아침도 가볍게 감자튀김으로 먹었다.(별로 먹히지 않았다.) 일행들의 컨디션도 다들 나쁘지 않은데, 계속 무릎 상태가 좋지 않은 은영 씨가 걱정이다. 그래도 은영 씨의 표정은 여전히 씩씩해서 아침을 먹는 동안에도 분위기가 좋다. 오늘 출발할 때 우리 팀은 모두 여섯 명이 되었다. 어제 밤에 어울리게 된 아버지와 아들(초3학년) 팀이 새로 합류했기 때문이다.(이 특이한 팀 때문에 약간 신경이 쓰였다.) 

   아무튼 지누의 나마스떼 호텔에서 출발할 때 뉴 브릿지로 내려가는 길을 내려다 보니까 마음이 흐뭇하다. 햇살은 따뜻하고 길은 계속 내리막길에다가 이제 산의 아래쪽은 서서히 초록색의 물결이다. 9시가 좀 넘어서 출발이다. 올라올 때 약간의 탈진 증세로 힘들었던 길이었는데, 내리막길은 문제 없다. 뉴브릿지까지는 거침 없이 달리다시피 왔다.  

   아버지와 아들 팀이 제일 앞서 가고 그 다음엔 내가 뒤에, 의주샘, 인도에서 넘어온 아가씨, 은영 씨... 이런 순서인데 걷는 동안은 서로 간격을 두고 띄엄 띄엄 걷기 때문에 서로 말이 없다. 일행들은 뉴브릿지에서 잠시 만나 물만 먹고 다시 출발. 다음 목적지는 사울리 바자르이고 거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사울리 바자르로 가는 길은 평탄한 들길을 걷는 것과 같다. 중간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사울리 바자르를 지나 첫날 머물렀던 숙소에 드디어 도착했다. 사람 좋은 롯지 주인도 여전히 웃으면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차례차례 내려온 일행들과 의논해서 간단하게, 늦은 점심을 먹었다. 벌써 시간은 2시를 넘겼다. 포카라까지 가는 로컬 버스가 나야폴에서 4시에 출발한다고 하니, 로컬 버스를 타려는 팀은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그 때, 의주샘이 은영 씨에게 던진 한 마디, "내 점퍼는?" 은영 씨 "-----" 이 때부터 30분 정도는 모두가 초긴장 상태. 사연은 이랬다.  

   의욕은 좋지만, 역시나 무릎이 문제인 은영 씨를 위해 의주샘이 은영샘의 배낭을 받아들었고, 대신 의주샘의 점퍼를 은영 씨에게 맡겼는데, 은영 씨가 사울리 바자르-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은 바자르에서 10분 정도 내려온 곳에 있었다-에서 잠시 쉴 때 그 점퍼를 가게의 의자에 그냥 걸어두고 온 것이었다. 서둘러 비스누가 뛰어갔고, 나머지 일행들은 '있겠지, 있을 거야' 하면서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점퍼 안주머니에 의주샘의 '여권'이랑 지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속이 타서 천천히 바자르로 올라가고 있는데, 저 쪽에서 환하게 웃으며 내려오는 비스누! 점퍼를 흔들어 보인다. 나도 서둘러 되돌아 와서 비스누가 점퍼를 들고 온다고 말하니 그제야 모두들 표정이 환해진다. 이제는 정말 나야폴에 도착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사울리 바자르 아래쪽은 길이 꽤 넓다.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이다.(물론 도로 사정은 말이 아니지만) 개울물이 흐르는 곳은 시멘트로 통로를 만들어 둔 곳도 있다. 비스누가 말하길, 나야폴에서 이곳을 거쳐 고라파니까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공사를 시작한지는 꽤 오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공사가 끝날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고 한다.(공사를 했던 곳도 벌써 유실된 것이 보였다.)  

   아마도 이 길이 정비가 된다면 ABC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일 것이다. 늘 그렇듯, 세상의 모든 변화에는 명암이 있겠지만 너무나 뻔히 보이는 '암'에도 우리는 너무 무기력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시가 다 돼서야 비레탄티에 도착. 체크포인트에서 다시 그린 카드를 꺼내서 검사를 받았다. 이제 모디콜라로 가는 계곡물은 아주 넓어지고 계곡을 걸친 다리의 길이도 제법 길다. 이곳은 우리로 치면 유명 관광지에 있는 집단시설지구쯤 될 것이다. 아이들도 우리를 쫓아와서 "sweet"라고 소리치면서 손을 내민다. 웃으면서 "no" 라고 말하면서도 서글프다.(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 중에 하나가, "네팔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나?"였다.) 

   우리는 나야폴까지 30분을 더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비스누가 여기서 택시를 타자고 한다. 나는 앞에 있는 길을 보고 이 길을 택시로 간단 말이야? 어, 올 때 사람 하나 겨우 건널 수 있는 다리를 건너왔는데... 그 다리는 어떻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택시가 들어와 있으니, 어떻게든 건너가겠지 싶어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흥정은 비스누가 했고, 택시 두 대에 여섯 명이 나눠서 탔다.  

   와, 그 울퉁불퉁한 길을 낡은 택시가 잘도 달렸다. 택시는 우리가 처음에 건너온 다리의 상류 쪽으로 난 길을 올라가서 얕은 개울물이 흐르는 지점을 골라서 그대로 건너버렸다. 우리가 탄 택시가 울퉁불퉁한 길을 지날 때 마침 말떼들이 섞이게 되었는데도 젊은 택시기사는 거침없이 질주한다.  

   포카라까지의 50분간의 질주. 도로는 여전히 엉망이라 우리가 탄 택시가 속도를 내서 앞에 가던 차를 좇으면 먼지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났다. 도로 곳곳에는 고장난 차들이 차를 고치느라 길가에 대놓고 있었다. 나는 우리 차가 가는 동안 무사하기만을 비는데, 비스누 또래인 기사와 비스누는 택시에 인도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흥겹다. 

   여섯시쯤 포카라의 낮술에 도착했다. 다른 일행들과는 헤어지고, 오늘부터 숙소를 따로 잡은 은영 씨와 포터 비스누를 위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리는 일단 낮술에 맡긴 짐을 찾고 낮술 사장님의 집으로 짐을 옮긴 다음, 다시 낮술 입구에서 은영 씨와 비스누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서 우리 넷은 포카라에서는 가장 유명한 한국음식점 서울 뚝배기로 찾아갔다. 

   서울 뚝배기에서는 한국말도 잘 통하고 시설도 비교적 깔끔했다.(롯지에 비해서는 호텔급이다.)삼겹살 정식을 주문하고 귀동냥을 하니, 어제 한국 뉴스에 '포카라에 여행 온 두 남자 실종'이라는  기사가 났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해프닝으로 밝혀졌지만... 집에서 걱정하고 있겠다, 싶어서 의주샘 전화기를 빌려서 집으로 전화를 했다. 예상대로 뉴스 보고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 동안 음식이 나왔다. 얼마만에 보는 삼겹살이냐? 음식이 꽤 훌륭하다. 상추는 좀 억세긴 하지만 먹을만하고 고기, 고추나 마늘, 쌈장도 한국에서 먹는 것이랑 똑같다. 무엇보다도 밥이 날리지 않는 게 젤 맘에 든다. 의주샘이나 은영 씨가 주문한 음식도 훌륭했다. 비스누는 뭘 시킬지 몰라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길래, '닭바베큐'같은 걸 주문했다. 다행히 비스누도 잘 먹었다. 

   식사후에 비스누에게 천 루피를 팁으로 줬다(10달러가 훨씬 넘으니 여기서는 제법 큰 돈이다).비스누가 고맙다고 했다. 닭바베큐의 가격을 보더니 좀 놀라면서 망설였다. 가격이 450루피였으니 그가 태어나서 가장 비싼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물론 비스누가 잘 먹긴 했지만, 나는 그 닭바베큐가 450루피나 할 정도로 비스누에게 맛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비스누 같았다면 100%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내가 만약 포터였다면 저녁을 안 사줘도 좋으니 그 돈을 현금으로 줬으면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좀 씁쓸했다. 비스누는 선택권이 없었으니까. 그는 이 저녁도 마지막 서비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입맛과는 상관 없이 맛있게 먹어줘야 할 의무감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다음날 낮술에서 저녁 먹을 때 여전히 포터들을 '위한' 저녁 식사가 이어지고 있더라.) 갑/을의 관계에서는 항상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우울함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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