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4일-여행 세째날(사울리 바자르-지누단다-촘롱) 

    

   첫째날 숙소에서 일어나니 보이는 풍경. 와, 마차푸차레다. 마차푸차레는 네팔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세 산 중 하나다. 아직까지 인류가 정상에 올라보지 못한 산. 높이는 해발 6993m. 1950년대 영국 원정대가 정상 부근 50m까지 접근한 적 있으나 등정에 실패. 이후 네팔 당국에서 마차푸차레의 입산허가를 내 주지 않는다.(참고로 8000m급의 산을 오르려면 입산허가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네팔 당국으로서는 꽤 짭잘한 수입원을 포기하는 셈이다.) 

   마차푸차레의 뜻은 '물고기 꼬리'. 그래서 영어로 그냥 'fish tail'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 포카라가 꽤 이름난 휴양 도시로 명성을 떨치는데는 맑은 날 포카라의 페와(Fewa) 호수의 수면에 저 아름다운 마차푸차레의 모습이 비치는 것도 단단히 한 몫을 한다고 말한다.(포카라에서는 그런 장면을 찍은 엽서, 달력, 사진이 무수히 많다. 물론, 환상적이다. 난 포카라에 있는 동안 직접 그 장면을 보지는 못 했지만!)  

  

   숙소를 나와서 UP바자르를 거쳐 평탄한 산허리 길을 돌아나오니 드디어 안나푸르나 산맥의 산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안나푸르나 사우스(7219m) - 히운출리(6441m) - 마차푸차레) 안나푸르나 사우스와 연결된 히운출리의 산허리를 돌아들어가야만 이 트레킹의 도착지인 ABC가 나오기 때문에 ABC에 도착하면 우리는 설산에 빙 둘러싸일 수 있다. 

   히운출리는 역시 네팔인(구릉족)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산 중 하나이고 특히 북서벽은 히말라야 산군에서도 등정하기가 가장 어려운 코스로 꼽힌다. 북서벽을 통한 정상 등정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적을 뿐더러 극소수만이 성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년(2009년)가을인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우리나라 원정대가 조난 사고를 당한 소식을 언론을 통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히운출리 북서벽 루트를 통해 등정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두 명이 실종되고 만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보기엔 참 멋진데, 정작 저기에 도착해 보면 또 어떨지... 기대와 걱정이 묘하게 교차하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저 위의 사진을 찍고 나서 다시 두 시간을 걸었다. 이제는 점점 설산이 눈에 담겨온다.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의 안나푸르나(8091m) 남쪽에 있는 안나푸르나 사우스의 모습은 푸근하기보다는 오히려 장엄하다. 이제 슬슬 오후가 되니 사우스와 히운출리 주변으로 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ABC 트레킹 루트의 산들은 항상 오전에는 청명하다가 오후만 되면 햇볕에 달궈진 지표면에서 구름이 만들어져 올라와 날씨가 흐렸다. (그러니 베테랑 가이드일수록 그날 오후의 날씨 예측은 잘 하지 않는다.)

 

   산을 바라보면 멋있고 좋기는 한데, 우리가 저기까지 가려면 걸어야 한다. 그것도 한 걸음씩! 아침을 바나나 팬케이크만 달랑 먹고 나섰더니 벌써부터 기운이 하나도 없다. 일행은 나까지 포함해서 모두 넷이다. 맨 앞에 동행자인 의주가 앞서고 하루 사이에 절친이 되어 버린 -의주가 우리 중에선 제일 영어를 잘 하니까-우리의 포터 비스누(22살), 그리고 경유지인 방콕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 대구 아가씨 이은영 씨(20대).(혼자 해외여행을 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데 앞으로의 여정이 무사할 것인지 조금 걱정스러웠다.) 아무튼 우리는 여행 내내 사진처럼 따로 또 같이 걸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다랭이논이다. 이곳도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상 저런 다랭이논밭이 많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다랭이 논으로 꽤 유명한 경남 남해군 남면의 가천마을(다랭이 마을)이나 지리산 자락의 연곡사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계단식 논밭과 견줄 수 있을 정도다.  

   항상 우리나라의 다랭이논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연스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는 한다. 그래서 그 자연스러운 곡선미는 우리나라의 것만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해 왔는데, 여기 와서 보니 우리나라의 다랭이논이랑 똑같은 모습이라 더욱 놀랐다.

  
   앞에 보이는 다랭이논밭을 일군 산을 돌아나와서 찍은 사진인데 이곳을 보면 우리가 알 고 있던 다랭이논밭의 스케일을 넘어선다. 사진의 오른쪽 위로도 끝없이 이어진 논밭~!! 아마도 수백층이 될 것 같은 엄청난 규모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니 네팔 사람들의 저력이 확 느껴졌다. 누구나 네팔이라는 나라에 간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나 네팔리들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이룩한 이들의 삶터를 보라! 저들이 지금 맞닥드리고 있는 온갖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과는 상관 없이 수 천년을 일구어 온 저 삶터의 아름다움에 네팔리들의 지혜와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산을 돌아와서 다른 산에 일구어 놓은 다랭이 논밭. 산 전체의 한 면이 전부 다랭이 논밭이다. 트레킹은 산 중턱으로 난 작은 길을 끝없이 걸어가는 여정이다. 이 사진을 찍은 곳은 노천온천으로 유명한 지누단다의 입구쯤인데 사진의 오른쪽 끝에서부터 급격히 내려가서 작은 계곡을 건넌 다음 다시 산 중턱까지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지누단다라는 곳에 닿는다. 

   사실, 이 때부터 몸이 좀 힘들었다. 우선 무릎을 구부릴 때마다 근육통이 조금씩 심해졌다. 아마 지난 1년 동안 운동도 하지 않고, 바쁘다는 핑계로 체력 관리가 전무했던 상황에서 예전에 좀 걸었던 것만 믿고 난 괜찮을 거라는 자만에 빠졌기 때문이다.(역시 인생은 자만을 용서하지 않는다.) 또 아침을 너무 부실하게 먹었던 탓인지 약간의 탈진 증세를 보였다. 손발이 조금씩 떨리고, 갈증이 점점 심해지고, 고산증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속이 조금 미식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지누단다까지는 가야 점심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갈 수 밖에 없었다. 나마스떼호텔(게스트하우스)의 피자가 맛있었다는 인터넷 여행기를 기억해 두었기 때문에 나마스떼호텔을 찾아 주저 없이 피자를 주문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나온 피자에서 야크 치즈 냄새가 확 올라오는데 배고픔이 싹 가셨다. 일행들은 연신 맛있다면서 허겁지겁 먹는데, 난 겨우 두 조각 먹었나?(거긴 피자가 좀 작은 크기라 1인분이 8조각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감자 chips를 추가로 주문해서 몇 개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거의 세 시가 다 되었는데, 오늘 가야할 곳은 산 꼭대기에 형성된 큰 마을인 촘롱이라는 마을이다. 나마스떼호텔에서 앞산의 꼭대기를 보면 산꼭대기에 파란색 지붕의 집이 보이는데 오늘의 목적지이다.(눈으로 보면 금방 갈 것 같은데, 우리 눈이 엄청난 스케일에 적응하지 못한 착시다.) 무릎은 아프지만 어쨌든 저기까지 가야 한다.  


 

   숙소가 있는 촘롱에 도착해서 찍은 마차푸차레의 모습이다. 예상대로 저녁이 되니까 마차푸차레의 산허리 아래에는 구름이 쫙 깔려 있다. 이 모습을 보니 네팔인들이 신성하게 여긴다는 이 산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환상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더구나 해가 지면서 어둠이 서서히 깔릴 때는 'Fade out'의 환상적인 연출!




   마차푸차레 옆에 나란히 있는 안나푸르나 사우스와 히운출리에도 서서히 구름이 올라와서 산을 뒤덮고 있다. 숙소에 짐을 풀고 'hot shower'를 한 다음에 2층 난간 앞에서 올려다 본 산의 모습이, 진부한 표현이지만 감동적이었다. 

   둘째날 중간쯤부터는 환경보호를 위해 이제 생수를 팔지 않는다. 끓이지 않은 물을 먹다가 혹시나 탈이 날까 싶어서 정수제를 준비했는데, 소독약 냄새가 심해서 좀 그랬다. 그러니 마실 물은 끓인 물을 숙소에서 사는 게 좋다.(당연한 이야기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비싸다.) 그러나 끓인 물(1L)을 사서 컵이나 병에 부으면 이물질이 둥둥 떠다닌다. 그러려니 하고 먹는 게 좋다. 만약, 이게 뭐지 하고 뚜껑을 열었다가는 더 먹기 찝찝할 수 있다. [참고로 내가 보온병-혹은 주전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는 알 수 없는 부유물질과 함께 맨 밑바닥엔 밥알이 2개, 고추가루가 몇 개 보였다.]

   저녁을 먹기 전에 샤워를 했다. 숙소에 들기 전에 hot shower가 가능한지 물었더니 물론 대답은 no problem이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겠다고 했더니 주인이 물을 가져다 준단다. 알고 보니 조금 뜨거운 물 1L를 주면, 샤워장에 있는 양철통에 담아서 찬물을 섞어 쓰는 게 hot shower란다. 차가운 것을 무지 싫어하는 나는 최소한의 찬물만 섞어, 양치+머리감기+샤워까지 거뜬하게 해 냈다.(내 뒤에 누군가는 거기다가 빨래까지 하더라.) 역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난가 보다. 

   촘롱에 있는 우리 숙소에서 외국인 여행자들과 본격적으로 말문을 트게 되었다.(물론 난 영어를 거의 한마디도 못하기 때문에 옆에서 듣고만 있었지만...) 혼자 온 중국여자도 있었고, 일본사람도 두 명(남자) 있었다. 이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고 어울리게 되었는데, 국적이나 나이를 초월해서 편하게 얘기했던(?) 것 같다.  

   덕분에 둘째날은 좀 늦게 잠자리에 들게 되어 새벽에 깨는 횟수가 훨씬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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