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 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려면
벌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에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 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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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관(지리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 천왕봉 농성자대표)
어제, 오늘 지리산에 다녀왔다. 이 시는 어제 사진 속의 분이 낭송해 주신 시다.(물론, 안치환의 노래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저 분은 지리산을 비롯한 국립공원의 무분별한 케이블카 설치 계획에 반대해서 10월 12일부터 천왕봉과 천왕봉 아래 장터목대피소에서 무기한 농성중인 분이시다.(어제가 50일째라고 하셨다.)
우리가 천왕봉에 올랐다가 장터목대피소로 내려오니까 고등학생들이 왔다며 관심을 보이시고, 저녁 준비를 하는데 계속 필요한 게 없냐고 물으셔서 마침 안 가져온 프라이팬을 빌렸다. 취사장에서 저녁을 먹고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느 분이 저 분이 시낭송을 하신다고 해서 무슨 시를 낭송하시나 싶어서 모두 귀를 쫑긋! 그런데, 세상에나 세상에나,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아니고, 예쁜 목소리도 아닌데, 남도 특유의 말투가 절묘하게 리듬을 타고 마음 속 깊이 울렸다. 시 낭송의 감동과 함께, 그제서야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지리산을 찾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짧은 낭송이었지만, 행복했다. 덕분에 새벽 일출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물론 탁월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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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1. 지리산 장터목대피소에서 들었던 그 감동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