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어젠 쪽방에서 늦게야 잠들었지만, 편하게 잘 잤습니다. 우리가 잠든 방은 어제 말씀드렸 듯이 씻을 곳이 없는 방이라 아침 세수를 복도 끝에 있는 싱크대에서 조심조심 합니다.(다른 사람이 깰까 봐서요.) 기분이 묘하더군요. 자꾸 주변을 살피게 되고-돈이 없다는 건 이렇게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인가?하는 생각도 잠깐 해 봅니다.-, 여행을 떠나 와 처음으로 제대로 씻지 못한 날이지 싶습니다. 오늘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숙소를 나오고 나서는 마음이 가볍습니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평소보다 약간 짧고, 날씨도 해가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숨었다 하는 터라 걷기에 적당할 것 같아서 입니다. 숙소 근처에서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으며, 주문진 읍내를 돌아서 나옵니다. 일요일 아침, 밤새 들뜬 모습으로 북적대던 관광지가 푹 잠이 들어 있습니다.

   도로에 올라서니 어제처럼 차가 씽씽 달립니다. 차들이 무서워 갓길에 바짝 붙어서 조심스럽게 걸어갑니다. 상황이 어제와 꼭 같습니다. 저에게는 이제 차가 정말 공포스러운 '흉기'로 느껴집니다. 저도 돌아가면 운전하고 다니겠지만, 이전과는 느낌이 좀 달라져 있을 것 같습니다.

   도로 오른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입니다. 어제처럼 날이 흐리지 않아서 코발트빛 바다 색깔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그 빛깔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아득한 저 수평선과 그 선에서 밀려올수록 점점 선명해 지는 바닷물, 그리고 하얀색 파도...사진기로 찍어서 보내드려야 하는데, 걸어가는 동안 저는 아무 것도 하기가 싫습니다.

   도로 왼쪽은 야트막한 야산들이고, 저 아득히 먼 곳으로는 구름이 가득 퍼져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보지 않아도 제 멋대로 만들어 내는 구름 모양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초록색 들판이 이어지기도 하고, 한가로이 '왜가리'같은 새들이 논에서 쉽니다. (오직 차만 너무 바쁘게 씩씩거리네요!)

   걸어가다 보니 도로 공기가 이상합니다. 바다에서는 서늘하고 차가운 공기가 언덕쪽으로 퍼지고, 언덕 쪽에서는 후끈한 공기가 밀려와 딱 도로중간에서 만납니다. 몸의 반쪽은 차갑고, 반대쪽은 후끈거립니다. 걸어가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점심은 현남면에서 먹습니다. 값싸게 먹을 수 있고, 만만한 게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라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아직 선뜻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안 납니다-결국 된장찌개로 점심을 먹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면사무소로 옮겨 짐을 풀고 앉습니다.

   일직하시는 분-두 아이의 어머니-이 두 아이를 데리고 면사무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의주샘은 바로 옆 건물인 '주민정보화교육장'으로 가고, 전 움직이는 게 성가셔서 그 두 아이랑 놉니다. 큰 녀석은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아인데 너무 귀엽습니다. 저랑 같이 그림도 그리고, 숫자 놀이도 하고, 곰인형을 가지고 노는데 정말 재미있네요. 제 수준이 딱 맞는 거 있죠? 아마 며칠 동안은 오늘 놀았던 그 생각을 하면 흐뭇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재미있게 노는 동안 잠시 '강원일보'를 슬쩍 보니, 도교육청에서 '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을 학교 자율로 시행하도록 했다는 기사가 크게 나오더군요. 얼마 전까지는 일정한 시간을 두어 제한했는데, 이번에 그 시간제한을 없앴답니다. 그게 학교 자율이라는군요. 정말 좀 제대로 잘 할 수는 없는지 답답합니다. 휴~! '해인(6살)'이와 '해찬(4살)'-같이 논 그 녀석들-이가 중학교에 갈 때쯤이면 좀 나아질까요?

   오후엔 휴게소에서 처음으로 도보여행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춘천에서 3일 동안 걸어서 양양까지 왔다는 대학생 3명이 너무 멋져 보입니다. 잠도 교회에서 얻어 자고, 돈도 거의 안 가지고 나왔답니다. 시커멓게 탄 온 몸을 보며,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어 아이스크림을 사서 내밉니다. 연신 고맙다며 수줍어하네요.

   다시 길을 나서 한참을 걷습니다. 처음엔 1km가 짧은 게 아주 크게 느껴졌는데, 25km나 30km가 별다른 차이가 없이 느껴집니다. 저녁쯤엔 다리 근육이 항상 뭉쳐집니다. 오늘은 중간에 적당하게 쉴만한 곳이 없어 계속 걷습니다. 한참을 걸어도 적당한 곳이 나오지 않아서, 도로 옆 인도에 짐을 풀고 잠깐 눕는다는 것이 아마 잠이 들었나 봅니다. 제법 시간이 많이 갔는지, 일어나니 다리 근육이 많이 풀려 있습니다. 이제 다시 힘차게 걸을 수 있겠습니다.

   7시 20분. 평소보다 약간 빠르게 양양에서 숙소를 구합니다. 값도 싸고, 괜찮은 곳입니다. 어제 못한 빨래를 다 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습니다.

   지나온 날, 밤마다 지도를 펴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지도보다 왜 걷느냐에 대한 질문을 제 스스로에게 해야할 것 같습니다. 싱겁겠지만 '즐기기 위해서'라는 답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누구나 즐기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겠지요?

2002년 8월 18일, 강원도 양양에서

느티나무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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