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1

   학교는 학급자치시간에 아이들을 강당에 모아 놓고 어떤 정신교육을 시키려는지, 또 두발검사, 복장검사, 손톱검사, 이름표검사, 양말검사, 뱃지검사를 하는가 보다. 지각하지 마라, 수업시간에 자지 마라, 비속어 쓰지 마라, 떠들지 마라는 소리를 학급별로 줄을 세워 놓고 했는가 보다. (올라가 보지는 않았고, 계획표를 보니 그랬을 것 같다.) 나도 물론 아이들에게 '하지 마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담임이긴 하지만, 모두가 학급자치 시간을 빼서 '정신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인지. 교육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인지. 효과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의문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를 때, 스스로가 이유를 알지 못할 때 선생으로서 괴롭다. 텅 빈 교무실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너는 왜 강당으로 가지 않았냐고?

풍경 2

   학급에 자장면이 오기로 한 시간이 13시 20분. 예상보다 한 5분 정도 늦게 왔으나 아이들의 즐거움은 엄청났다. 자장면 40그릇과 서비스로 나온 요구르트와 귤을 앞에 두니 모두 신나는 얼굴들이다. 며칠 전에 학급 모두가 교과서 옮기기를 한 댓가로 연말에 지급될 교과서 분배 경비를 사비로 미리 써 자장면을 주문했다. 거짓말처럼 자장면을 비우는 녀석들이 무지 귀엽다. 단무지 하나를 두고 다투는 녀석들이니 덩치만 컸지 아직 어린애들이다.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장면을 보고 있으니, 또 자장을 잔뜩 묻힌 입으로 나를 보며 씩 웃는 그 녀석들이 참 예쁘다. 애들은 내가 정색하고 질문을 하면 무섭다고 한다. 너희들이 내 마음을 어찌 아랴? 난 너희들에게 무서운 사람이고 싶지 않다. 너희들이 학교에서 행복했으면 하는 아주 단순한 희망 밖에 없는 사람이다.

풍경 3

   2교시가 끝나고 잠깐 내려간 교무실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김기수-육군 상병이다. 휴가를 나온 모양이다. 늘 휴가 때면 잊지 않고 나를 찾는 고마운 녀석인데, 오늘은 내가 수업이 많아서 쉬는 시간에 잠깐 얼굴만 보고 보내야했다. 돈도 없는 군인 녀석이 늘 음료수를 사들고 찾아온다. 다행스럽게도 아픈 곳 없이 건강한 얼굴을 보니 무척 반갑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군생활에 대해, 이제는 후임병들이 네 이름을 소원수리함에 써 넣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고 후임병들에게 잘 하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해 주었다. 후딱 왔다가 선걸음에 발길을 되돌리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짠하다. 다음에 보면 꼭 더운 밥 한끼라도 먹여야겠다.

풍경 4

  오늘은 수능칠 때 우연히 만난 언아를 보기로 한 날이다. 약속은 저녁 6시. 동네에 도착하니 OO, 수진, 혜선이가 나왔다. 모두가 졸업하고 처음보는 얼굴들이다. 2년 동안 모두 씩씩하게 산 얼굴들이다. 모두가 예뻐진 것 같다. 

   OO는 이번이 삼수째. 올해는 성적이 기대만큼 안 나왔는데 교대든 사범대든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곳에는 어디든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수진이는 전문대를 졸업하게 되는데 취직이 쉽지 않아 걱정이었다. 혜선이는 인테리어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데, 학교다닐 때부터 얌전하고 성실한 녀석이었던지라 오늘도 새로 산 책을 한 보따리 들었다. 조용한 곳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고등학교 때 이야기, 요즘 사는 이야기, 주변의 친구 이야기,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느라 늦게야 일어서게 되었다.

   중간에 군대가 있는 영선이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어색한 군인 말투에 약간 당황했지만, 며칠 후면 휴가 나오는데 그 때 꼭 찾아오겠다고 해서 '아, 이놈이 내가 가르친 영선이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너희들의 이야기 들어 주고, 술 한 잔 받아 주고, 힘들 때 왔다가 잠시 쉬어갈 여유를 마련해 주는 것이 내 몫이 아니더냐.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세상에 나왔지만 당당하게 제 몫을 해내고 있는 서부산공고 졸업생들! 힘내고 언제나 너희들에게 좋은 일들이 가득하기를 빈다. 건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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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30 15: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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