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행복 찾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시작할 땐 날씨 얘기를 하는가 봅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오늘 문득 어쩌면 날씨가 우리들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당하면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까요. 우리를 요즘처럼 불편하게 하면 그제야 다들 날씨 얘기를 호들갑스럽게 하게 됩니다. 이렇게 날씨 얘기를 쓰고 보니까 우리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다시 한 번, 직업병이 도지는 걸 허락하신다면 저도 우리 아이들이 투정을 부리기 전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금방 여름 땡볕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아이들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면 곧 아이들 때문에 근심해야 할 때가 올 것 같습니다. 론 제가 편하자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요.

   저도 날씨 얘기부터 하자면 오늘은 약간 흐리면서도 바람이 조금씩 부는, 걷기엔 더 없이 좋은 날입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온 곳도 있나 봅니다. 쪼그만 나라-걸어다녀 보면 이런 말 절대로 안 나오지만-에서도 이렇게 날씨가 다르니-방금 서울에 계신 한 선생님께서 전화가 왔는데, 비 오지 않았냐며 걱정하셨습니다-신기합니다.

   오늘은 밀양시내에 있는 밀양교에서 영남루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밀양시내를 한바퀴 돌아 나와, 밀양 긴늪이라는 곳까지 걸어 청도쪽으로 방향을 잡고 상동면까지 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꼬박 12킬로미터를 오전에 걸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점심 먹고, 잠시 쉬었다가 청도 방면으로 계속 걸었습니다. 오늘은 청도군까지 와서 숙소를 잡고 경산 쪽으로 좀 더 걸어갈 예정이었습니다. 큰 고개도 없었고, 밀양강 상류를 좇아 계속 걸어가는, 강을 끼고 도는 길이 으레 그렇듯이, 이 길도 너무 예쁩니다.

   다른 얘기지만 오늘은 도보여행의 매력에 대해서 든 잡다한 생각을 잠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본질적인 부분은 첫날에 잠깐 말씀을 드렸기에, 오늘은 여행길에서 소박하게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걸어다니니까 무척 아픕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지만, 우선은 너무 다리가 아픕니다. 종아리 근육은 뭉쳐 있고, 발가락에 물집은 잡혀서 걸을 때마다 따끔거립니다. 발목도 너무 많이 걸으면 시큰거립니다. 또 큰 배낭을 지고 가니까 허리도 아픕니다.

   날씨가 너무 더운 날은 피부가 햇볕을 그대로 받아서 저녁이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옷은 입은 지 30분이면 땀에 흥건하게 젖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채로 하루를 계속 입고 다녀야 합니다.

   잠자리도 영 불편합니다. 물론 돈을 많이 내면 좋은 숙소를 구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라 우리가 내는 돈으로 선뜻 방을 내주는 곳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입니다. 그러니까 피로가 점점 쌓이는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집에선 부모님이 해 주시는 많은 일들이 힘들어도 직접 해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편한 것에 너무 익숙해서 잘 몰랐던 일이 제 일로 다가오는 것도 무척 힘듭니다. 그러니 하루 일과가 아무리 빨라도 11시쯤에야 겨우 납니다.

   그래도 이 모든 불편을 이기는 도보여행의 재미도 쏠쏠합니다. 길가 아무 곳에나 쓰러져 쉴 때 받게 되는 뜻하지 않은 환대는 그간의 힘든 고통을 모두 잊게 합니다. 오늘도 밀양시 상동면사무소와 우체국에서 받은 호의-매실냉차와 커피 한 잔이지만-에 무척 행복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쉬고 싶으면 쉬고, 개울이 나오면 발을 담글 수 있는 것도 멋진 일입니다. 오늘 걸은 길은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새로 고속도로를 만든다며 산의 곳곳을 헤집어 놓았지만, 그래도 강물만은 넉넉하게 제 갈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얘긴지 잘 모르겠지만, 유천 부근의 밀양강에 배낭을 풀고 강에 발을 담글 때의 기분은 걸어다니는 사람의 특권이리라 믿습니다. 물 속엔 피라미들이 저희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살더군요. 완전히 자기들만의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을 뒤집어 은빛 비늘을 보이기도 하고, 물살을 거슬러 오르기도 하며, 물에 담긴 제 발을 스치기도 했습니다.(이런! 세상에~! 고기가 제 발을 치고 갑니다.) 그네들의 행복한 모습은 무언의 압력으로 제게 '제발 이대로 내버려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수 만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이 생물들을 몰아내고... 또 그곳에다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아무튼 오늘 그 공간에서 잠시나마 생각할 수 있는 것도 도보여행의 좋은 기억인 거 같습니다.

   길을 가다가 가끔씩 놀라게 될 때도 무척 행복합니다. 오늘 도로를 걸으며 길옆으로 서 있는 과실수를 보며, 이 많은 과일을 누가 다 먹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천으로 널린 복숭아나무...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복숭아를 본 것은 아마 오늘이 처음이지 싶습니다. 맨 가장자리는 감나무가 심겨지고, 다름으로 복숭아나무, 그리고 저 안쪽으로는 파란빛의 사과가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겐 많은 분들의 도움이나 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정말 저 혼자 다니는 거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과(더구나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동행하고 있다는 느낌은 이 여행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오늘 드디어 제 친구 가락중학교 장준호샘이 중국 실크로드 여행을 마치고 귀국해서 전화를 해 왔습니다.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나니까 몇 킬로미터는 거뜬해 집니다.

   또 내일 아침엔 위로방문을 오시겠다는 전화도 저를 너무 기쁘게 합니다. 길 위를 걸어가는 두 청년이 안쓰러워 같이 걸으시면서 도움을 주시려는 분들의 마음씀씀이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해지기부터 합니다.

   이제 그만 쓰고 씻고 자야겠습니다.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괜한 말씀만 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 꼭 후회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길을 걷는 제가 실을 꿰고 가는 바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걷는 걸음이 바늘이 실을 매달고 지나가면 한 뼘 한 뼘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옷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옷이 만들어지는 날까지 열심히 걸어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무더위에도 좋은 꿈꾸시며 행복하시기를 뵙니다.

2002년 8월 5일

경북 청도에서 느티나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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