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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의 섬 ㅣ 사계절 1318 문고 28
한창훈 지음 / 사계절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사람은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지 못할 때 겉은 반듯하게 보여도 속은 상처로 곪아서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좌절된 자신의 욕구를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는데,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좌절된 욕구를 적절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다른 사회에 비해서 거의 전무한 편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이 살기 어려운 사회가 아닐까 싶다. 청소년들은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면서 곪았던 그 상처를 폭발시키고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런 시기가 지나면 자신의 상처를 바로 보고, 자신의 상처를 껴안을 수 있게 되는데, 그 때 청소년들은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닐까?
배경은 섬이다. '서이'도 섬이다. 사방은 모두 바다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바다다. 섬은 운명적으로 단절된 곳이다. '서이'도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다. 그래서 '서이'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단절은 갑갑함과 고립을 낳는다. 이 갑갑하고 고립된 섬에서 세상과 끈이 닿는 유일한 방법은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이미 엄마와 두 언니들은 섬을 떠났다. 여섯 살 어린 '서이'와 다리를 약간 저는 아버지를 남겨둔 채로!
서이는 이제 열 여섯, 중학교 3학년이다. 청소년, 그 시기야 원래 어중간한 때이지만, 그 중에서도 열 여섯은 또 그 가운데이니 그야말로 어중간한 나이. 이제 곧 뭍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 인문계를 가고 싶어, 아버지께 이야기를 꺼냈다가 괜해 야단만 맞았다. 실업계에 진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서이는 제일 행복한 때는 혼자서 공상을 하고 있을 때다. 서이가 공상을 하고 있으면 이 답답한 섬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상하는 것은 아무도 특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서이의 특기다. 서이는 섬에 황금배가 온 것을 상상하고, 엄마를 다시 만나는 것도 그려보고, 뭍에서 성공하는 꿈도 꾸고…… 그러나 늘 공상에서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보면 현실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서이는 집을 나간 아내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술만 먹으면 신경질을 부리고 욕을 해대는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며 날마다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고, 그런 '서이'를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좋아하는 '이배'의 관심과 어린 조카에게서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본 엄마 같은 '큰이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서이는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은 섬에서의 생활에 막연한 불안감과 갑갑함을 느끼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육지에서 낯선 여자가 이 섬으로 찾아오고, 서이는 무엇인지 모를 소리에 이끌려 까닭도 모르고 섬을 돌아다니다가 그 여자의 바이올린 소리가 자기를 불러낸 것임을 알게 된다. 섬을 벗어난 본 적이 없는 '서이'와는 달리 온 세상을 돌아다니다 온 이 여자를 통해 서이는 진정한 자신의 재능과 삶에 대한 방향, 낯선 세상을 만나게 된다. 이 낯선 여자는 서이를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창'인 것이다. 서이는 이 낯선 여자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한 영혼의 성장, '큰이모'의 죽음과 여자와의 이별을 통해 비로소 내적인 성숙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열 여섯이었을 때를 생각해 본다. 도시에 살아서 그런지 별로 고립감을 느낄 수 없었지만, 남보다 잘 하는 게 없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모르는 막막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누구를 만나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어른인 '내'가 되었나?'를 생각하면 신기하다. 어느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렇게 어른이 되었을 것인데,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그 시기에 별다른 갈등 없이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너무 격렬한 과정을 겪어서 모두 잊어버리고 싶은 것일까? 나에게는 어떤 상처들이 있었나를 다시 뒤돌아 보게 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