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신호등 -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 위한 자기성찰의 거울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중략) 장교는 나이를 먹으면서 진급한다. 사병은 나이를 먹어봤자 사병으로 남는다. 실제 전투는 주로 사병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이 사병으로 남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 그럼 나는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 오래 전부터 가졌던 생각이다.
그러면 전투는 왜 하는가? 살아야하므로. 척박한 땅에서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워 작은 열매라도 맺게 하는 거름이고자 한다. 거름이고자 하는 데에는 자율통제가 필요치 않다. 욕망이 춤춘다. 그렇다.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
-책날개에서

   이 책의 책날개를 보고는 무릎을 쳤다.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내가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 소통하는 것이, 깨달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즐겁다. 나는 언제가 되었든, 내가 교단에서 내려올 때까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다. 나는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옳은 것, 아름다운 것,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홍세화 씨의 경우처럼, 내가 교실에서 수염 풀풀 날리며 실제로 전투를 치르는 '척탄병'이고 싶어도 학생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아마도 교사들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아이들을 피해 모두다 '관리자'가 되려고 알게 모르게 애를 쓴다. 나도 아이들과 소통되지 않는 것이 두렵다. 이 두려움이 내가 일하는 날까지 나를 긴장하게 해서 끊임없이 나를 갈고 닦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빨간 신호등이라……. 이 투박한 표지에 써진 책의 제목은 미친 듯이 빠르게 변화하지만(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압축성장이라고 자부심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숨가쁜 변화에 대한 필수 요소인 방향성에 대한 고민은 없는 우리 사회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나타내는 듯하다.

   이 책의 짤막짤막한 글들은 1999년 5월부터 2003년 4월까지 지난 4년 동안 한겨레신문의 '홍세화의 빨간 신호등'이라는 칼럼에 실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특정한 주제로 묶여진 것이 아니라,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안들에 대한 홍세화 씨의 인식과 판단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흐름과 일정한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글에 의하면 여전히 우리 사회는 평범한 시민들을 절망과 체념으로 몰아가는 사회, 역사적 성찰과 계몽이 부족한 사회, 정치인들의 감정적인 선동이 먹혀드는 병든 사회, 지독한 남성중심의 마초 사회, 획일적인 목소리를 강요하는 사회, 사회 정의를 잃어버린 법에 의지하는 사회, 교육은 국가의 경쟁력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그 부담을 오로지 개인에게 떠넘기는 사회, 기회주의적 지식인이 판치는 사회, 그 지식인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조폭 신문'의 논리가 일상화된 사회, 이성적인 물음보다 색깔론이나 지역감정이 더 먹혀드는 사회, 남성,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여성, 중소기업,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이 결여된 사회, 기득권 세력의 오만, 억지, 뻔뻔함이 대중의 무지와 망각 위에서 통하는 사회, 공직자들이 사익을 추구하는 사회,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불온한 눈빛으로 의심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를 바꾸는 시작은 일상에 대한 일상적 되돌아보기를 통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비판적 의식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고, 비판적 의식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역사 의식을 키워 우리 사회의 물줄기를 진보의 방향으로 옮길 수 있다. 또 하나 그가 강조하는 것은 공교육이 변화이다. 지금처럼 만인에 대한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에서 벗어나 옳은 것, 아름다운 것, 인간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부터, 꿈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꿈을 되찾아 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냉소와 체념이 기득권의 온상임을 꿰뚫고, 의지적으로 낙관하는 그의 존재가 더욱 빛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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