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평점 :
'지금 이 순간에도 단 한마디의 기도조차 생각해내지 못하고 오직 차갑게 의심만 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더할 나휘없는 두려움과 절망을 느껴야 헸던 것이다. 이 구제받을 길 없는 자의식 과잉. 나를 둘러싼 이 철갑처럼 무겁고 두터운 껍데기. 신이 지금 내게 형벌을 내리고 있다면 바로 그것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가슴 태우며 욕망하지도 못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해보지도 못하고...' '하늘등'중에서
소설가 이창동의 92년 발표 작품집인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읽다가 마지막 즈음에 이 구절을 읽으며 마음이 꽉 막혔다.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90년대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이념의 시대를 마감하지 못한 작가의 고민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집이다.작품에 등장하는 주인물들은 주로 확고한 이념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으로, 끝없이 회의하고 의심하는 고민형의 인간이다.(대표적인 경우가 하늘등의 '정신혜'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신념에 찬 인물들의 삶과 주로 대비되고 있는데, 결국 소설은 서로 대비되는 인물들이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공감대를 느끼게 되는 구조로 짜여진 것 같다.
80년대를 관통하고 있는 소설을 읽고 있으니 '아! 우리 사회가 이랬었지!'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투박하고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지마는,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고, 사회가 무척 건강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지하고 고민이 많은 사회,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시대로 80년대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진지하고 성실한 고민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치지 않는 이창동 장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욕심일까? 현실적인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하는 곳이며 홍선생의 삶의 보람인 아파트가 있는 곳인, 시적인 이름을 간직하고 있어 도리어 비현실적인, 그리고 똥이 많은 녹천에서, 저 멀리 반짝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언제까지나 변치 않을 별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