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동행해 주실 거죠?

   불볕 더위에 건강하십니까? 이렇게 한더위마다 길을 나서 힘들게 걸어가는 것은 제 팔자가 늘어진 탓인가요? 아니면 남들처럼 편안함을 즐기지 못하는 제 못된 성격 탓인가요? 어느 것이든 상관없이 다시 길 위에 섰습니다. 작년 여름, 남도횡단을 마치고 마음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힘들어도 앞으로 힘차게 걸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저와 동행해 주실 거죠?

   이제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어쩌면 마음 졸이시고, 한참을 걱정하시면서 먼저 간 제 길을 뒤따라오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니면서 힘들었던 일, 답답한 일을 모두 마음에 담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끔 가다 만나는 운 좋은 경험도 나눌 겁니다.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는 시간이지만 저와 함께 한 해 주시는 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이 좀 늦었습니다. 2002년 8월 3일 아침 8시 40분. 동행자를 만나 아침을 먹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합니다. 편의점에 들러 김밥을 말없이 먹으며 가벼운 마음을 먹도록 애를 씁니다. 좋아서 떠나는 길이지만, 이렇게 가볍게 맘을 먹도록 애를 써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에겐 낯익은 덕천교차로를 지나 똑같은 아파트만 늘어선 화명동을 지납니다. 벌써 땀이 나고 다리와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 눈에 익숙한 마을을 보는 것은 여기가 마지막이겠지요. 한참을 걸어 도시 같지 않게-어쩌면 도시 변두리의 일반적인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잡초들이 도로 옆 인도까지 점령하고 나선 금곡동을 지났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한껏 멋을 낸 2호선 지하철 역사(驛舍)와 우리와는 반대로 편안하게 내려가는 낙동강 줄기를 건너다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호포역에서 잠시 쉬었다가 이제 번잡한 국도를 버리고 양산시 물금읍으로 난 갓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경부선 철길을 건너니 이내 도시와는 전혀 다른 곡식들의 세계가 나타납니다. 땡볕에도 씩씩하게, 믿음직하게 자라는 벼, 키만 멀쑥하게 컸지 아직 알은 성긴 옥수수, 하얀색 꽃을 뽑아 올린 참깨, 수더분하고 낯익은 콩, 고추, 땅속에 보물을 감추고 시치미를 뚝 떼고 땅을 기는 고구마, 양산을 쓴 것 같은 연과 토란. 모두가 제 각각의 모양으로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곡식과 채소들의 은혜의 원천인 태양이 저도 함께 키우려는 하는 것인지 열을 내뿜습니다. 이 햇볕을 안으며 걸어가는 길이 끝날 때쯤이면 조금 더 단단해져 있을까요?

  1시간 30분을 더 걸어 물금읍에 도착했습니다. 물금읍은 제 어릴 적 기억이 많이 남은 곳입니다. 외가(外家)가 있어 외할머니가 계실 땐 방학마다 며칠씩 묵었다가 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로 외갓집에 대한 기억은 멈췄지만, 더 보탤 추억이 없는 옛 기억은 더 아련하게 다가오는가 봅니다.
   몇 년 전부터는 낙동강이 바로 보이는 마을 입구 쉼터에 수 백년을 지키고 선 나무 밑에 서서 강물을 보는 버릇도 생겼습니다.(밤에 가끔 차를 몰고 갔다 온 길입니다) 이곳은 여러 가지로 제 삶에 무척 소중하고 아픈 기억들이 담겨진 곳입니다.

   점심을 먹고, 쉴 곳을 찾아 근처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물금초등학교. 작은 시골마을 학교가 대부분 그렇듯이 아름드리 나무가 학교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 큰 나무는 언제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까요? 운동장 옆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는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그 때는 아마 제법 이 시골 초등학교도 아이들로 복작거렸을 겁니다. 운동장을 뛰어 놀던 그 아이들 틈으로 자그마하지만 참하게 생긴 여학생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아마도 또래 아이들과 재잘거리며 신나게 학교를 다녔겠지요? 그 여학생이 학교 담을 대신해서 심어진 작은 묘목이 학교의 역사를 말해주는 아름드리 나무로 자란 것처럼 한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셨답니다. 바로 저를 낳아준 분이십니다.
   문득 잠에서 깨어 나무에 가만 손을 갖다 대어 봅니다. 그 때는 어렸겠지만 이 나무에도 우리 어머니의 손자국이 남아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나무도 그 시절의 수줍고 마음 여린 여학생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지난 학기 내내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 놀았을 우리 학교 학생들도 언젠가는 누구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겠죠. 그보다 더 세월이 한참 지난다면 또 누군가가 지금의 나처럼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자기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저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지금의 우리 학교가 학생들에게 응어리진 상처를 남기지 않고,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시 40분. 만만한(?) 물금읍파출소에서 물을 받아 원동으로 가는 지방도(1022번)에 섰습니다. 좁은 갓길에다 차는 많고-특히, 시멘트 공장이 근처에 있어서 대형트럭이 많습니다.- 또 날도 무더워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딱 하나! 오르막을 올라선 덕분에 고갯마루에서 본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의 해질 무렵의 풍경이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는 힘이 됩니다. 

   해는 설핏 지는데, 바다를 향해 내려온 수 백 리를 흘러온 강물은 잔잔하게 흐르고, 지는 햇빛을 받아 강은 은색 비늘이 반짝거리기도 하고, 점점 해가 져서 강물에 검붉은 염색이 점점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덩달아 저희들의 발걸음도 느려집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린 강으로 치자면 아직 발원지를 벗어나지도 못한 물인데- 부지런히 가야할 듯 합니다.

  작년 편지에 제가 길은 참 정직하다고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길의 정직함을 믿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그리 심지가 굳지 못한가 봅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고갯마루를 올라서면 사람을 붙잡고 원동까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기어이 물어보고야 맙니다. 오늘도 물론 속았지만요.(?) 아저씨께서 재미있는 표현을 하셨는데 ‘30분이면 뒤집어쓴다’고 하시더군요. 우린 ‘그 30분이면 뒤집어 쓸’ 그 길을 1시간 30분을 걸었습니다.

   원동은 생각보다 훨씬 멀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의 모든 길이 생각보다 훨씬 멀지 모릅니다. 제 머리 속엔 있는 생각은 항상 ‘차’를 기준으로 한 거리일 테니까 말입니다. 원동에 도착해서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배내골 입구 마을인 원동은 여느 관광지처럼 시끌벅적합니다. 이런 곳일수록 자는 데 돈이 많이 드는데. 운 좋게도 ‘오늘 여관을 인수한’ 주인 내외를 만나 정신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잠자리를 구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다리가 벌써 작년의 기억을 잊어버린 듯 합니다. 발목과 발바닥이 시큰거리고, 종아리 근육이 약간 뭉친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다리도 다시 옛 기억을 떠올리겠죠. 아마 튼튼하게 잘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오늘은 작년과는 달리 발가락에 물집은 잡히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동행자와 라면과 김밥으로 저녁을 먹는 것으로 하루를 정리합니다. 중간에 먹은 간식과 비싼 숙박비로 예산을 초과한 탓에 약간 부실한 듯 했지만 예산도 빠듯한데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벌써부터 가지고 온 책이 걱정입니다. 겨우 두 쪽밖에 못 읽었습니다. 작년에는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반 밖에 읽지 못해서 이번에는 열심히 읽으려고 굳게 다짐했는데.

  떠나기 전에 말씀드린 대로 길을 걸을 때 피하지 않고 제 속에서 건네 오는 많은 목소리들과 이야기를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이제는 진정으로 제 자신과도 화해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런 다짐으로 다른 사람들도 걷는지, 길을 걷는다는 것을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하는 것인가 봅니다.

   제 메일을 받으시면 가끔 지도책을 펴놓고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마디도 안 되는 짧은 길을 온 천지에 가득한 햇볕을 받아 종일 기진맥진해서 걸어가는 두 청년을 생각하시고, 이 무더위와 함께 하셨으면 합니다. - 너무 염치없는 부탁입니까?

   다시 한 번, 저와 동행해 주실 거죠? 건강하시고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2002년 8월 4일
 느티나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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