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사람들 9

- 사랑

 

월정사 부처님처럼

마음을 비우고 잠드는 밤에

마음 저켠 벌판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여리게 혹은 강하게 비가 내렸습니다.

눈물보다 투명한 그 빗방울들은

삽시간에 하늘의 절반을 적시고

우수수 우수수수수

부처님 발목 밑에 내려와

잠들지 못하는 새벽 풀잎 옆에

오랑캐꽃으로 피었습니다

은방울꽃으로 피었습니다

초롱꽃으로 피었습니다

바늘꽃, 두루미꽃으로 피었습니다

사랑꽃, 이슬꽃으로 피었습니다

아......

신록으로 꽉찬 오월 언덕에서

햇빛 묻은 미루나무 몇 그루

아름다운 이별처럼 손 흔들고 있었습니다

고정희, 지리산의 봄, 창작과비평사, 1994(재판)

   촛불문화제에 다녀온 밤에 시집을 펼쳤다.

   어제 저녁엔 무시로 비가 쏟아진 거리에 우산 하나 달랑 들고 문화제 앞자리에 서서 버티다가 비옷을 사 입을 생각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가 눈에 띈 큰 서점 안으로 들어가 어슬렁거렸다. 비가 퍼붓는 거리는 한기 때문에 소름을 돋게 하더니, 서점 안은 온기가 있어 밖으로 나가기가 더욱 싫었다. 시집이 꽂힌 서가대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내리는 빗줄기가 그치는가 싶어서 밖으로 나오니 참가자들은 거리 행진을 시작했다. 나도 얼른 합류해서 경찰청까지 걸었다. 그곳에서 만났던 일행들은 보이지 않고, 역시 혼자 오신 김OO 선생님을 만나 말동무도 되고 끊임없이 구호도 외쳤다. 경찰청이 있는 연산동까지는 왜 그렇게 멀었던지... 남들 다 하는 구호도 나만 안 할 수 없고. 지금도 목이 살짝 아프다.

   경찰청 앞에서 이어진 정리 집회. 자유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말도 조리 있게 잘 하고, 재치가 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동맹 휴업을 결의한 부산지역 대학의 학생들이 삼삼오오 많이 참가했었다. 생기발랄한 청년들을 보니 든든했다. 하지만 내가 가르친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10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집에 들어오니 11시가 다 되었다. 그 때부터 이것저것 많이도 먹었다. 밤이 깊어 가는 시간, 습관처럼 책을 펼쳤다. 서점에서 기웃거린 시집 때문인지 시집을 펼친다. 고정희의 '지리산의 봄'.

   밤이 깊도록 시집을 읽는다. 문화제에 다녀온 날이다. 밤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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