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문화제, 서면, 2008.05.31

   5월 24일 서울 교사대회에 갔다온 이후로 일주일이 흘렀다.  매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면서도 아직 한 번도 못 나갔었다. 지난 토요일은 오전에 학교 일과가 있었고, 오후에는 공부방 아이들과 책읽기를 하는 날이다. 수업이 끝나면 보통 6시 반 정도, 거기서 아이들과 저녁을 챙겨먹고 얘기 좀 하면 8시를 훌쩍 넘긴다. 또 친한 선생님이라도 계시면 얘기는 더 길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토요일은 수녀님들도 미사보러 가신다고 일찍 나섰고, 저녁은 비빔국수를 미리 준비해 놓으셨던지라 금방 먹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름값도 기름값이지만, 오늘은 서면에 꼭 가 보리라 생각하고 학교에서 나올 때 차도 타고 오지 않았다. 지금껏 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기분으로 서면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좀 많이 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지하상가에도 문화제와 상관 없는 사람들로 그득하다.

   조급한 마음에 얼른 쥬디스 태화 옆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우와, 앉아 있는 사람들의 끝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공목길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놓고 앉은 사람들이 신기하였다. 맨 뒷자리까지 찾아서 앉았다. 뒤로 가는 동안 아는 사람이 있을까 기웃거리다가 우리 과 96학번 후배를 만나 같이 앉았다.

   줄이 얼마나 길었던지 문화제 행사를 하고 있는 맨앞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맨 뒤에 앉은 내 뒤로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니까 사람들로 꽉 찼다. 그래서 서면로터리 앞의 8차선 도로 입구에서부터 서면중학교 앞에 있는 도로까지 시민들이 모두 길바닥에 앉았다. (사실, 문화제를 하고 있는 맨앞이 보이기는 커녕,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아서 구호 한 번 외쳐보지도 못했다.)

   대충 집회가 정리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주섬주섬 일어나 자기 주변을 정리하더니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도로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선봉대에 서게 되었다.) 서면 CGV입구까지 2차선 도로를 점거하며 갔다가 차가 안 다니는 옆 골목으로 따라온 시위대와 합류하면서 중심도로(8차선)로 나왔을 땐 4차선을 점거하면서 행진했다.

   부/산/시/민/함/께/해/요/와 이/명/박/은/물/러/나/라/, 고/시/철/회/협/상/무/효가 핵심 구호였는데, 구경하는 시민들의 반응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정말 가족들이 다 나온 경우도 많고, 경쾌, 상쾌, 유쾌한 문화제였다. 차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한참 걷고 있는데, 집에서 연락이 왔다. 진복이가 안 자고 놀고 있는데, 힘들다고 한다. 어쩔까 하다가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

   이후 시위대 선봉이 동보서적 앞에 이르러 8차선 도로를 점거하기 위해 뛰어들었고 단숨에 성공(?)했다. 그러자 경찰도 경고방송을 하기 시작했고, 시위대가 우회해서 서면로터리를 점령할 것을 걱정했는지 전경들이 로터리로 우회하는 골목을 막기 시작했다. 이후 지리한 대치가 계속 되었다.

   나는 인도로 나와 지하철을 타러 내려왔다. 도로 위의 긴박함과는 상관 없이 토요일밤의 지하상가는 젊은 사람들의 열기가 가득하다. 지하철 거리공연에도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만약에 오늘 집회에서 경찰과 충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내 가방에 챙겨넣은 종이컵과 촛불이 서럽다. 지하철을 타니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도 최소한의 빚은 갚은 날이라는 생각이다. 제대로 갚으려면 아직 많이 멀었다. 이번 주에 올 수 있는 날짜를 꼽아본다. 음, 며칠은 나올 수 있겠다 싶은데... 세상 일은 참 알 수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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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6-0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날 동보서적 앞 8차선 도로를 차지하고 새벽 2시까지 집회를 하고 간간이 충돌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와서 아프리카를 보는데, 5.31-6.1 진압의 비극이 나와서 밤새 울었습니다. 현충일날엔 서울에라도 한번 올라갈까 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 2008-06-03 11:06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휴일에 데모하러 서울 가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사회니 정말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부산은 '청와대'가 없어서 긴장감이 확실히 덜 하더라구요. 노래도, 부산 갈매기 부르던걸요?ㅎ
방금 교무보조 선생님이 저보고, '샘 어제 감만 부두에 가셨어요?'라네요. 이거 학교에서 완전히 찍혔네^^::(제 대답이 저 겁 많고 소심해서 그런데 못 가요, 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교실에서도 '샘은 왜 촛불집회 안 가요?'라는 소리 들었을 때도 똑같은 대답을 해 줬는데...그래, 말하면서도 영 기분이 찜찜한 게...어째야 할 지 모르겠더군요. 어떻게 대답해 주는 게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