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횡단 도보여행 8-9일째

광양에서 벌교까지


    광양 시장통 근처 여관을 나서는데 곧 비가 올 태세였습니다. 하늘이 낮게 깔리고 곧 비가 쏟아지는데...준비해 간 비옷을 꺼내 입고 좀 걷다가 가까운 슈퍼에 들러 아침을 먹었습니다. 오늘도 빵과 우유, 복숭아 통조림 한 개.

   곧 시내를 오른쪽으로 끼고 외곽으로 나왔습니다. 계속 4차선 도로는 이어지고,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졌습니다. 순천까지는 비교적 쉽게 넘어왔습니다. 광양에서 2시간 정도 더 걸으니까 순천 외곽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비도 피하고, 점심도 먹을 겸해서 쉴만한 곳을 찾다가 순천시 여성회관으로 들어갔고, 사무실에서 신문지를 빌려다 깔고 그냥 길바닥에다 누웠습니다. 저는 다리가 무척 아파서 더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더구나 오늘은 비도 제법 많이 내렸습니다. 한참을 쉬다 근처 분식집을 찾아 대충 점심을 때웠습니다. 그리고 또 비가 온다는 핑계로 미적미적~ 피시방에 들러서 1시간을 더 보내고 2시에 벌교로 출발했습니다. 비는 계속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고, 차들은 쌩쌩 달리면서 바닥에서도 빗방울이 마구 튀어 올라 걷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미화원아저씨께 순천 가는 길을 여쭤보니 벌교간다니까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시네요. 거기서 벌교까지는 23킬로미터. 비가 오락가락하는 토요일 오후에 우리는 쉼없이 걸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가는지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길을 따라 앞만 보며 걸었습니다. 그 벌교까지의 길이 어찌나 멀던지...지금 다시 그 길을 걸어오라면 당장 그만두겠다고 얘기할 것 같습니다.

   벌교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쯤. 그래도 열심히 걸은 덕분에 예상보다 1시간은 일찍 왔습니다. 시내에서 숙소 정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덕분에 싸고 깔끔한 방을 잡았습니다. 저는 발가락의 물집 때문에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서 약국에서 약으로 치료를 좀 했습니다. (약사님께서 그만두고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김밥을 맛있게 먹으니 벌교가 어떤 곳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태백산맥의 주무대잖아요. (벌교 들어가기 전에 친절한(?) 아저씨께서 벌교엔 양아치들이 유명하니 밤에 돌아다니지 않은 게 좋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소설에서 뿜어져 나온 분위기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시내를 자꾸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마침 숙소도 벌교 양아치들 비슷한 사람들이 하는 것 같기도 해서 괜히 어떤 사람들일까 상상도 해 보니 실실 웃음도 나오고...발가락이 무척 아픈 것 빼고는 유쾌하고 즐거운 하룹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 100리.

  9일째 아침은 벌교읍내 중심가 농협에서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었습니다. 오늘도 괜히 말을 붙이고 싶어서 역 근처에서 복숭아 2개도 샀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비해서는 짧은 28킬로미터만 가면 보성읍내가 나옵니다. 역시나 날씨는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사실 3일 전부터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계속 걱정했는데 하루 빼고는 걷기에 적당한 비만 왔습니다. 오전엔 무척 열심히 걸어서 보성군 조성리라는 마을에 들어가서 잠시 쉬었고, 예당이라는 마을로 들어가다가 우리를 불러 세우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가게로 갔더니 음료수를 2개 건네셨습니다. 점심도 원래 5천원인데 4천원으로 깎았고, 근처 고등학교에 가서 2시간 동안 푹 쉬었습니다. 4시에 출발해서 길 따라 열심히 걷는데 도로변으로 차가 서더니 먹고 힘내서 가라며 주먹밥을 건네주었습니다. 어느새 비는 내리고, 우리는 주먹밥을 손에 쥐고 멀리 보이는 읍내를 향해 걸었습니다.
   오늘 저녁엔 김의주선생님을 응원하러 멀리 부산에서 후배 2명이 왔습니다. 내일 그 주유소 광고에 나오는 그 길(보성다원)을 저희와 함께 걸어갔다가 밤기차로 부산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덕분에 저도 힘이 더 나서 즐거운 저녁을 같이 먹었고 얘기 좀 하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늘 저녁은 무척 시원하네요. 바람 속에서 맛있고 시원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습니다. 낯선 보성읍내를 어슬렁거립니다. 여긴 정말 녹차가 유명한가 봅니다. 다원도 많고, 녹차냉면, 녹돈(녹차먹인 돼지)집-삼겹살-도 많네요...

   광양, 벌교, 보성으로 넘어오면서 빠른 세상과 담을 쌓고도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분들에게 빠른 것은 어떤 의미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곱게 차려입으시고 읍내로 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을 느릿느릿 걸어가시는 할머니, 비 오는 잠시를 이용해서 논두렁길에 심어 논 콩밭을 김매시는 할머니, 대낮에도 막걸리 한 잔으로 얼굴이 불콰해도 지나가는 사람 하나 놓치지 않으시고 챙겨주시는 할아버지, 해저녁 자전거를 타지도 않고, 끌면서 터덜터덜 걸어가시는 아저씨, 바쁜 농사일 짬에도 우리가 건네는 인사가 무안하지 않게 허리를 펴고 어디로 가는지 물으시는 분들....사실 바쁜 건 아직도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는 시간이 무척 천천히 흐르는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떤 마을은 너무나 천천히 흘러서 나른하기도 했습니다. 도시와 똑같이 하루는 24시간일텐데요. 그래도 비교적 바쁜 건 젊은이들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네요. 이젠 자러 가야겠습니다.

보성읍에서 이주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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