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한다.(흔히 말하는 모교지만 공립학교라서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 오늘 동창회 선배들이 공부하느라 고생하는 재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간식(떡과 음료수)을 들고 학교로 찾아오기로 했다.

3. 며칠간 계속 퇴근이 늦었던 나는 오늘 일찍 집에 가서 쉬다가 오려고 했으나, 이 일 때문에 학교에 남아 있었다.

4. 평소에 야간자습을 하는 인원이 턱없이 적어서 동창회에서 준비하는 간식이 많이 남을 것을 걱정하고, 아이들에게 간식이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렸고, 남아서 간식 먹고 가라고 했다.(자습인원이 대폭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

5. 자습이 시작되자 방송을 통해 반별로 대표학생을 불러 배달된 간식을 나누고 30분 정도는 먹을 시간을 주었다.

6. 아이들이 간식을 먹는 동안 선배들(7명 정도)은 3학년 교실을 반마다 돌면서 인사도 하고, 공부하느라 고생한다는 말과 수능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덕담도 건냈다.

7. 먹을 것이 들어간 아이들은 연신 싱글벙글인데다가 자율학습이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되다 보니 더욱 기분이 좋은지, 선배들이 무슨 얘기를 해도 모두 큰소리로, 예,라고 답한다.

8. 나는 선배들이 떠난 교실마다 들어가서 간식은 정해진 시간까지 먹고 집중해서 자습할 것을 당부했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수능 대박을 기대하는 것은 요행 심리일 뿐이며, 미안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공부 열심히 해 온 사람이 억울하지 않겠느냐, 그런 세상은 잘못된 세상이라고 냉정하게 말했다.(우리 학교 애들 공부는 잘 못한다.)

9. 오늘 학교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했다. 동창회 선배들은 후배들이 학교에 많이 남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봐서 기분이 좋았을 테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선배들을 살갑게 맞이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간식 준비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10. 행복하기는 재학생들도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찹살떡 3개에 음료수 한 개였지만,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더구나 한창 먹을 나이인지라 먹거리만한 선물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지루한 자습시간이었으니 이를 두고 일석이조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을 지도 모른다. 조금만 일상이 달라져도 호기심이 가득한데,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좋은 말로 응원해 주니 더 뿌듯했을지도 모른다.

11. 오늘은 우리 학교에서 나만 불행한 듯 했다. 간식 먹는 애들 붙잡고, 저런 위협이나 해야하는 내가 싫었다. 나도 선배들처럼 우리 아이들-후배이기도 한-에게 일년에 한 두번 찾아와 따뜻하게 격려하고 돌아가서는 선배로서 최소한의 몫은 했다는 뿌듯함으로 하루를 보낸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12. 흐뭇한 웃음을 흘리고 가는 선배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재잘대며 간식을 먹는 후배들을 창밖에서 바라보며 오늘은 우리 학교에서 나만 불행한 듯 느껴졌다. 애들에게 잔소리나  해대고, 공부 안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위협하는 내가, 이 녀석들의 선배이자 선생인 내가, 스스로 억울한 하루였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샘 2007-11-0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쩌다 보니 내년에 모교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억울해질까요? ㅎㅎㅎ

느티나무 2007-11-03 09:55   좋아요 0 | URL
글쎄요. 평소엔 아무 생각 없다가 꼭 이런 날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적당한 거리가 있으면 안 봐도 좋을 모습은 넘길 수 있는데, 지금의 저는 그 거리감이 완전히 없으니까요~! 3년 동안 담임과 2번의 학년기획 업무를 했는데 내년에도 담임을 해야할 지 모른다네요. 모교 선배가 안 하면 누구 하냐는 논리-말도 안 되는 말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쌩까고 있습니다.


BRINY 2007-11-04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교도 사립이고, 지금 있는 곳도 사립. 그래서 절대 모교로 가기 싫던데요. 지금은 같은 교산데도, 한번 제자면 영원한 제자. 무슨 일 있으면, 쟤 학교 다닐 때 운운하는 사람들 싫습니다.

느티나무 2007-11-04 13:01   좋아요 0 | URL
저번에 제가 쓴 글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부임하신 교감선생님-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이셨지요. 거 참 미묘한 관계.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몰염치에는 그냥 모른 척하고 있는 게 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