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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내 인생 - 손문상 화첩산문집
손문상 지음 / 산지니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구포시장’의 추억
초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는 가끔 텃밭에서 키운 부추며, 호박을 구포시장에 내다 팔고는 하셨다. 할머니 옆에 딱 붙어서 싸움 같은 흥정과 고도의 심리전 끝에 가격을 정하는 그 방식이 조금은 낯설기도 하고, 할머니께서 받은 그 돈이 아이스크림으로 변해 곧 내 입으로 들어오리란 생각에 마냥 신나기도 했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시장 근처에 산다고 하면 개를 도살해서 도소매로 팔아넘기는 것으로 유명한 동네 시장 탓에 아이들에게 가벼운 놀림의 대상이 되고는 했다.
구포시장. 대부분의 재래시장이 백화점, 대형마트에 밀려나는데도, 아직 구포시장은 사람들로 복작거려서 아직 시장다운 맛이 있다. 비록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라, 후줄근한 모습 그대로지만서도. 물론 더 활기찼던 예전만 못하겠지만, 지금도 구포시장은 늘 앞에 가는 사람을 살피며 걸어야 할 만큼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으로 복잡한 곳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장 근처에 살아서 어디나 이런 시장이 있는 줄 알았는데, 구포시장처럼 큰 시장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진짜 사람 냄새 폴폴 풍기는 시장의 매력까지 알게 된 것은 더 오래된 이후였지만.
오늘 나는 책 속에서 비릿하면서도 세련되지 못해 들큼한 사람냄새 가득한 시장 냄새를 맡았다. 손문상 화백의 ‘브라보 내 인생’의 표지 그림이 바로 낯익은 우리 동네 시장, 구포시장 풍경이다.
결코 '브라보'일 수 없는, 인물-청소 아줌마.
제일 앞부분의 영도 해녀 편은 읽고 나면 웃음이 슬며시 떠오른다. 물론 고통스러운 현실을 웃음으로 눙쳐온 저 이면에는 얼마나 눈물바람이 잦았을까, 생각을 하니 웃음 뒤끝에 마음이 애잔해진다. 그래도 이제는 일흔 하나. 강해춘 할머니는 앞으로는 더 웃을 일이 많으실 것 같아서, 그림을 보는 마음이 따습다.
그러나 결코 브라보일 수 없는 인물로 고심 끝에 청소 아줌마 편(43쪽)을 골랐다. 물론 청소 아줌마의 인생이 ‘브라보’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냥 그림 속의 아줌마의 삶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브라보 내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줌마가 얼마나 될까? 아니,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라보일 수 없다’는 내 표현은 청소 아줌마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대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야 살만한 세상이 가능하다는 내 소박한 연대감의 표현이다.
청소 아줌마 편. 한 아주머니의 웅크린 모습이 그림의 가운데. 밑에는 연필로, ‘닦고 닦자 한 세상’이라고 적혀 있다. 형광등이 환히 켜진 복보 바닥은 이미 깨끗하게 닦여져 있고 아줌마는 그림 속의 복도 끝으로 계속 청소를 해 나가느라 몸을 웅크린 채로 뒤돌아서 앉아 있다. 아마 그림 속 아줌마의 등 뒤에, 보이지는 않지만 ‘비정규직’, ‘파견’, ‘저임금’, ‘차별’, ‘가난’ 이런 단어들이 주홍글씨처럼 박혀 있을 것이다. 그림 속 아주머니의 바람? 월급 좀 올라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 단풍놀이 다녀오는 것이란다. (지금이 바로 10월말. 단풍놀이 철이다.)
결국 '브라보'일 수 밖에 없는, 인물-김진숙 씨
사실, 얼마 전에 소금꽃나무(김진숙, 휴머니스트)를 읽었다. 집회 현장에선 언제나 스스로는 아주 순박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연대사나 투쟁사를 읽었지만, 그 연대사를 듣던 나는, 아니, 우리는, 집회참가자의 본분을 잃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느라 민망하게 만들었던 그 목소리가 검정색 글씨로 변해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손문상 화백의 그림 속에서 그이는 연대와 희망의 이야기꾼답게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늘 짧은 커트머리는 변함이 없고, 한 손에는 마이크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매직펜을 들고 있다. 그는 아마 오늘 강연에서도 나 같은 사람을 여럿 울렸을 것이다. 나는 그림 속의 김진숙 씨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그이 특유의 말투가 금방 머릿속에 되살아나서 책 속의 글자들을 빨아들인다.
민주노총부산본부 지도위원. 20년도 더 전에 한진중공업에서 해고 되어서 아직 현장에 돌아가지 못한 노동자. 김진숙 씨는 이제 현장보다 집회장에 더 많이 다녔을 텐데도 여전히 복직을 이야기한다. 그는, 늘 연대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노동자들끼리의 단결과 연대를 말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인 연대를 말한다. 그런 다음에야 노동운동에 새로운 희망이 있음을 말한다. 노동자들에게 언제나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어떻든, 누가 뭐라고 하든, 이 사람의 인생은 ‘브라보’ 일 수 밖에 없는 거 아닐까?
뚝심으로 만든 귀한 책!
손문상 화백이 부산일보에 연재했던 ‘화첩인터뷰’를 묶어낸 이 책은 신문으로 나왔을 때나 책으로 만들어졌을 때나 한 사람의 뚝심으로 만들어낸 신문이나 출판시장에서 아주 희귀한 사례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론적으로 신문은 새로운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알리는 매체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가 없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 아무리 흔해도 신문에 날 일은 없다. 신문쟁이가 딱히 그 사람을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소설가 김곰치와의 대담을 읽으니 ‘계기’가 없다, 라는 표현이 나오더라.) 그러나 ‘사람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손문상 화백은 이런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고, 그들의 모습을, 아니 그들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을 그림으로 그려 신문에 실었고 이번엔 책으로 펴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잘난 사람들의 특별한 삶 말고, 너무 평범해서 이름을 얻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하루하루가 모여 세상살이의 근본을 이루는 것 아닌가? 이 당연하고도 자명한 이치에 왜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적은 것인지, 귀해서 더욱 손문상 화백의 이 책이 반갑다. 더구나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동네(부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어쩌면 이 사람들과 길에서 가볍게 스치기도 했을 뿐, 단 한 번도 주목하지 못했던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애정을 보내준 책이 있어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