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15-202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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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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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의 일출, 노고단의 구름바다, 반야봉의 저녁노을, 피아골의 단풍,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 세석평전의 철쭉꽃길, 칠선계곡의 처녀림, 연하봉의 벼랑……
선생님께서도 한 번쯤은 저 어느 한 곳에 발을 디디신 적 있으신지요? 젊은 날, 어떤 누군가와 함께 멋모르고 오르느라 고생하신 기억도 있으시겠지요?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라니 언젠가 다시 지리산에 가시게 되는 날, 선생님께서 두고 온 오래 전 청춘의 기억을 그대로 되찾으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는 기말고사 출제의 ‘넓고 깊은 지리산’을 오르셔야 할 때인가 봅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길게 이어진 오르막길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계단도, 몹시 험해 보이는 봉우리도, 아주 멀리 보이는 목적지도, 결국은 한 발 한 발 걸으면서 시간을 보내면 모두 지나가게 될 것이고 오롯이 추억만 남을 것입니다. 2023학년 1학기의 마무리를 위해서는 이 또한 지나가야 할 일입니다. 이번 한 주도 힘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