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13-2023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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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번교사를 하던 날이었지

흰 종이 쓰레기 한 점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려 있었어

누군가 손에 쥐었다가

무심코 버렸으리라,

생각하며 허리를 굽히는데

세상에, 그게 흰 장미인 거야

이슬 같은 물기를 머금고

생글 웃고 있지 않겠어?

자세히 보니 제 몸에 가시를 박은

한 줄기 초록빛 가녀린 선이

측백나무 울타리 속을 비집고 올라와

흰장미 한 송이를 후끈 피워놓은 거야

나는 생각했지

처음에는 그 장미가

정말 흰 종이 쓰레기였을지도 모른다고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린

찢겨진 한 영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허리를 굽혀

다가가기 전까지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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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오는 휴일이었습니다.

밤사이 선생님 댁에는 아무 일 없으셨는지요?

 

장미꽃 피는 5월의 끝자락에 소개하는 이 시는

주번 선생님(옛날에 학교 업무로 주번이 있었습니다.)

학교 울타리에 걸린 쓰레기를 주우러 갔다가

자세히 보니 쓰레기가 아니라 흰 장미였다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일상의 경험을 소개하는 범상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시인의 마음은 역시 다른가 봅니다.

이 선생님처럼 누군가가 다가가

자세히 그 장미를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그 장미는 쓰레기,

찢겨진 한 영혼으로 남았을 거라는 말이지요.

멀리서 봤으면 대부분은 이 장미를 쓰레기로 봤을 것이니까요.

 

선생님께서 다가가서 봐 주지 않으면 흰 장미찢겨진 한 영혼으로 남는다……

시골 학교 30년 경력의 영어 선생님의 시가 범상하지 않습니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 시를 보면서 저는 우리 학교 정원에 있는 장미 터널이 떠올랐습니다.

올해 이 장미 터널이라는 이름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도록

우리 학교 행정실 선생님들에서

새 장미꽃을 사 와서 심고,

이미 있는 장미는 가지를 쳐 다듬고,

장미꽃이 제대로 활짝 필 수 있도록 받침대를 세우는 등 무척 노력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이 또한 허리 굽혀 장미꽃에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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